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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영국의 자만과 오판, 결국 총리마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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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과학수준과 공공 의료체계, 팬데믹 전략에 "우린 준비돼 있다" 강조

섣부른 '집단면역' 전략에 봉쇄조치 지연…검사역량도 확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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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 영국 존슨 총리…집중치료 병상 이동 (CG)
[연합뉴스TV 제공]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영국은 내심 자신이 있었다.

중국에서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도, 이것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 이탈리아까지 확산할 때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어떤 나라던가. 1901∼2017년 과학(생리의학·물리·화학) 분야 노벨상을 받은 영국인만 87명이다.

미국(263명)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고, 유럽 내 앙숙인 독일(70명), 프랑스(33명)보다도 월등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가장 정확하고 최신의 과학적 증거에 따라 전염병 대응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영국의 공공의료 시스템인 국민보건서비스(NHS)도 믿는 구석 중 하나였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14일 발간호에서 각국 의료시스템의 구조와 권한에 따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의 능률이 달라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 면에서 영국의 NHS와 같은 보편적 의료체계는 국가 주도로 의료 자원을 일사불란하게 조직하고 실행해 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발달한 의학과 국가적 부(富)에도 불구하고 민간의료보험 시스템이 코로나19 대응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에서 2천800만명에 달하는 비보험자, 1천100만명의 불법 이민자, 병가급여를 적용받지 못하는 이들이 코로나19 검사나 격리를 회피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정부는 또 오래 전부터 치명적인 전염병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비해왔다.

로이터 통신은 영국 국무조정실이 팬데믹을 테러리즘이나 금융위기보다 더 국가에 위협이 되는 요인으로 평가하고, 그동안 이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해왔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영국 보건부는 이른바 '독감 팬데믹 준비 전략'을 계속 업데이트해왔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탈리아에서 사망자가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한 지난달 초 "우리는 (코로나19에) 매우 잘 준비돼 있다"면서 "우리는 환상적인 NHS를 가지고 있고, 훌륭한 검사 시스템과 감염 확산에 대한 감시 체계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현재 영국의, 그리고 존슨 총리의 자신감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지난 8일(현지시간) 기준 영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6만733명으로 전 세계에서 8번째로 많았다. 사망자는 7천97명으로 5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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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피커딜리 서커스 대형 전광판에 올라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국민 메시지 [로이터=연합뉴스]



존슨 총리는 다른 주요국 지도자보다 휴업 및 휴교, 이동제한 등의 엄격한 봉쇄조치를 늦게 결정했다.

영국 정부에 조언하는 과학자들은 3월 중순까지 중국의 우한 봉쇄와 같은 극단적인 조치를 권고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에 익숙한 영국 국민이 이같은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준비한 '독감 팬데믹 준비 전략'이 오히려 영국의 코로나19 대응 차질을 빚은 요인 중 하나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전략에 관여한 상당수 과학자와 관료들은 코로나19 대응에도 참여했다.

이는 코로나19를 마치 독감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대응하게 만드는 인지 편향을 불러왔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대응 전략을 보고받은 집권 보수당의 한 고위급 정치인은 로이터 통신에 "우리는 코로나19가 심각한 독감이며, 그런 방식으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면서 "즉 이 질병을 막을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반면 이전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같은 보다 치명적인 전염병 확산을 이미 겪었던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 한국은 대규모 검사와 봉쇄 등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도입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코로나19를 독감 정도로 여기면서 나온 것이 바로 논란을 불러온 '집단면역'(herd immunity) 전략이다.

집단면역은 백신이나 감염으로 한 집단에서 일정 비율 이상이 면역력을 갖게 되면 집단 전체가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면역학 용어다.

패트릭 발란스 영국 정부 최고과학보좌관은 지난달 13일 현지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영국 인구의 60%가 코로나19에 감염돼야 집단면역이 생길 수 있으며, 지금까지의 정부 대응은 이같은 집단면역 확보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목표는 바이러스를 전적으로 억제하는 게 아니라 정점 시기를 늦추는 데 있다"면서 "대부분의 (코로나19) 환자는 가벼운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감염 후) 면역이 되면 일종의 집단면역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코로나19가 계절독감처럼 매년 발생하는 질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집단면역은 코로나19 감염자 대부분이 가벼운 증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제를 한 것인데, 실제로는 코로나19는 독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률이 높았다.

누적 확진자 수 대비 누적 사망자 수 비율을 나타내는 치명률은 8일 기준 영국이 10.14%, 이탈리아가 12.67%에 달했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지난달 26일 한 대담에서 "코로나19의 치명률이 전형적인 독감의 사망률보다 10배가량 높다"며 "전 세계가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전염병 전문가들을 인용, 집단면역은 통상 백신 프로그램을 통해 달성 가능한 것이지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대응 수단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집단면역 전략은 '위험한 도박'과 같다고 평가했다.

결국 며칠 뒤인 지난달 16일 존슨 총리는 펍과 극장, 영화관 출입은 물론 불필요한 여행 등 사회적 접촉을 최소화할 것을 국민에게 당부하면서 집단면역 전략에서 선회했다.

이어 지난달 20일부터 모든 카페와 펍, 식당의 문을 닫도록 한 데 이어 23일부터는 슈퍼마켓 및 약국 등 필수 영업장을 제외한 모든 가게의 영업을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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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업 조치로 문을 닫은 런던 시내의 다양한 가게들 [신화=연합뉴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Brexit)도 영국의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문제를 불러일으킨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영국은 지난 1월 31일 마침내 브렉시트를 단행했다.

이후 지난 2월 13일부터 3월 30일까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EU 정상 또는 보건장관 간 열린 8차례 콘퍼런스콜이나 만남에 영국은 불참했다.

연말까지는 브렉시트의 원활한 이행을 위한 전환(이행)기간이 적용되는 만큼 영국 대표 역시 회의 참석이 가능했었다.

EU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공동으로 산소호흡기 구매를 추진할 때도 영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나중에 논란이 불거지자 영국은 행정적 실수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과 EU 간 의사소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믿었던 공공의료 시스템도 안 좋은 쪽으로 작동했다.

영국은 코로나19 발병 초기 북런던에 위치한 잉글랜드 공중보건국 산하 연구소 한 곳에서만 코로나19 검사 샘플을 처리했다.

영국이 자랑하는 대학과 기업의 연구소 수백여곳에서 코로나19 검사 역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정부는 이를 활용하지 않았다.

집단면역 전략에 따르면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이 코로나19에 걸리게 되는 만큼 검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지 두 달이 지난 3월 22일에서야 대학과 민간 연구기관에 검사 지원을 요청했다.

반면 독일은 민간 연구소 등을 통해 발 빠르게 코로나19 검사를 시작했다.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19 검사건수는 영국이 2천300건으로 독일(1만15건)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검사건수당 양성판정 비율은 영국이 19.3%로 독일(7.5%)보다 배 이상 높았다.

검사역량 부족은 코로나19 대응 최전선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서비스 종사자마저 코로나19 검사를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의심증상이 있거나, 가족 중 의심증상이 있는 의료인력들은 검사 대신 자가 격리를 취하느라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 실제로는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의료인력 다수가 집에 머물렀고, 이는 다시 현장 인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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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코로나19 '드라이브 스루' 검사소의 차량 행렬
(글래스고 AFP=연합뉴스) 영국 글래스고 공항 주차장에 들어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드라이브 스루' 검사소 입구에 5일(현지시간) 차량이 줄지어 서 있다. leekm@yna.co.kr



결국 영국의 코로나19 대응은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총체적인 자만 또는 오판의 연속이었음이 드러났다.

존슨 총리는 지난달 27일 주요국 정상 중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이후 상태가 악화돼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

존슨 총리는 영국에서 이미 수십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지난달 초 병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지도자로서 그의 이같은 부적절한 대응은 결국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이 됐다.

'바이러스에 눈은 없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영국에서는 총리와 내각의 여러 고위 각료, 심지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찰스(71) 왕세자까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굳이 전염병 감염에서까지 솔선수범하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영국 지도층의 미온적인 코로나19 대응 분위기가 반영된 것 아닐까 추정해 본다.

pdhis9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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