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0 (금)

[책과 삶]페미니즘으로 본 현대 문화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원본 없는 판타지

오혜진 외 지음

후마니타스 | 600쪽 | 2만5000원

경향신문

<원본 없는 판타지>는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한국 현대문화사를 읽어낸다. 해방 후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지만 민족전통 반열에서 탈락한 여성국극의 1960년 공연 포스터.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60~1970년대 유행한 ‘고고댄스’는 이른바 ‘노터치 댄스’였다. 기존 사교댄스와 달리, 파트너와의 접촉 없이 혼자 추는 춤이라는 점에서 1960년대만 해도 비교적 건전한 춤으로 취급됐다고 한다. 1971년, ‘퇴폐풍조정화세부시행계획’이 공포되면서 대대적인 단속에 직면하기 전 얘기다.

유흥계를 뒤흔든 고고댄스 열풍에, 어김없이 ‘국산화’ 바람도 일었다. 1970년 MBC 전속 안무가 김완률에 의해 창안된 8분의 6박자 국산 노터치 댄스의 이름은 ‘굿거리 춤’으로 명명됐다. 그런데 국제무도협회에 등록했다는 이 춤의 영문 이름이 다소 당혹스럽다. ‘굿거리(GOOD-GIRL)’. ‘터치 없는’, 착한 여자들의 춤이란 것이다.

1960~1970년대 유흥문화와 냉전시대의 성문화를 분석한 역사연구자 김대현은 이 시기가 한국 대중문화의 ‘찬란한 태동기’였지만, 동시에 “무대에서 몸을 흔드는 여성의 존재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성적 대상화의 시선은 여전히 건재했다”고 말한다. 가령 비슷한 시기 사이키·고고붐을 타고 걸그룹과 K팝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각종 ‘시스터즈’ 바람이 불었는데, 이들의 해외 진출을 두고 쏟아진 비상한 관심이 그랬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대한의 딸’ 혹은 ‘한국의 정부가 행하여 온 여러 가지의 외교 선전보다 더욱 많은 효과를 거두어’ 주는 국위선양의 상징으로 부각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래 문물에 지나치게 노출된 존재로 묘사됐다.”

일본에 진출한 펄시스터즈의 인터뷰 기사에선 ‘한국 남성이 제일 좋다’는 제목이 내걸렸고, 김시스터즈는 “부디 성공해 결혼은 우리나라 사람과 하라”는 모친의 말이 기사화됐다. 외국인들과 데이트를 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린 펄시스터즈 한 멤버는 “여러분의 ‘펄’은 순결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앞으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힘껏 노력하겠으니 계속 귀엽게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김대현은 이를 “여성 가수들이 해외에 진출해 활동하더라도, 그들을 성적 대상화할 수 있는 주체는 ‘한국 남성’이어야 한다는 발상”이라고 말한다.

경향신문

<원본 없는 판타지>는 일제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관점으로 한국 문화사의 여러 변곡점들을 다룬 문화비평서다. 2018년 10회에 걸쳐 열린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본 한국 현대문화사’ 강좌를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영화와 미술, 여성국극, 대중가요, 로맨스소설과 순정만화, 동인지, 예능과 게임 등 여러 장르를 망라한다. 각 분야 전문가 14명이 함께 집필했다. 책을 기획한 문학연구자 오혜진은 “기존 문화사의 성적 배치, 즉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위치를 그저 기계적으로 뒤바꾸는 것을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유일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사고를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원대한 야심’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자리 바꾸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원본’으로 상정하게 하고, 이와 다른 모든 욕망과 실천을 ‘모방’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데뷔 때부터 ‘바지 패션’을 고수하며 ‘언니 부대’를 이끌어던 가수 이선희.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채윤은 1980년대 ‘언니 부대’를 이끌었던 가수 이선희와 이상은, 2000년대 데뷔한 가수 엠버까지 이른바 ‘톰보이’로 불려온 여성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낱낱이 분석한다. 데뷔 때부터 짧은 머리와 안경, 바지를 고수해온 이선희에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고 묻는다. 저자는 이들이 당대의 성별 규범을 벗어나고도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별 규범을 ‘교란’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애 섹슈얼리티에 눈뜨지 않은, ‘건전한 소녀로서 허락된 톰보이’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내놓는다. 이미 최고 반열에 오른 가수에게 집요하게 반복됐던 ‘치마는 언제 입느냐’는 질문은, 줄곧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켜온 가수 엠버의 성정체성을 의심하며 비난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1980년대 ‘성별 표현’에 대한 통제가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성적 지향’에 대한 통제로 전환됐다는 저자의 분석도 설득력 있다. 한채윤은 “이분법적 성별 규범에 맞춰 살라고 강제하는 사회적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이 여성 가수들의 ‘자기다움’ 실천에 주목하며, 남들과 다르다고 지적을 받아도 굴하지 않는 이 모든 도전과 실천을 ‘퀴어링’으로 정의한다.

경향신문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였던 남역배우와 퀴어 합창단의 목소리가 만난 2016년 공연 <변칙 판타지>. 남산예술센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책은 문화비평을 통해 미러링,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의 최신 논의들도 다룬다. 안소현은 ‘폭력의 언어’와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해 고안된 ‘폭력을 흉내내는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룩셈부르크의 행위 예술가 데보라 드 로베리티가 2014년 여성 성기를 그린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앞에서 실제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성공적인 ‘미러링’의 한 예로 든다. 단순히 혐오의 강도를 높여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전략으로 ‘차이’를 드러내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