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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세상사는 이야기] 다들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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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길고 또 길어질 것 같은 이 질병의 시기를 다들 그렇듯 문을 닫고 견뎌내고 있다. 그래도 어쩌다 밖으로 가면 텅 빈 가게들 안에서나 닫힌 가게들을 지나면서나 마음이 어둡다. 우리보다도 상황이 훨씬 더 나쁜 나라들에 있는 가족, 연로한 친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옥죄어 온다.

다들 조심스레 발길을 삼가는 데다, 국내 일정들은 물론 질병 확산이 극심한 유럽 지역 일정들이 모두 가을로, 내년으로, 혹은 무기한으로 연기돼 조용히 일하며 지내고 있다. 이 와중에 가로세로 뛰어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황공하고 송구스러워 평소보다 일을 훨씬 더 많이 한다. 무엇보다 그간 허겁지겁 해오던 일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며 재점검하고 있다. 거의 처음으로 갖는 정리와 성찰의 시간이 몹시 소중하다.

처음에는 당황한 마음에 가족에게, 연로한 친지들에게 내가 안 쓰고 아껴 둔 마스크라도 몇 장 보내보려다 우체국에서 무안을 당하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이즘은 몰두해 종일 일하고 저녁이면 가깝고 먼 지인들, 특히 우리보다 형편이 나쁜 지역에 있는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써 보낸다. 참으로 오래 해본 적 없는 일이다. 늘 소식을 받고도 답을 잘 못 쓰고, 답을 못 써서 -얼른 답을 쓰는 대신- 스트레스나 받기도 하며 지냈다. 그런데 내가 안부 인사를 보내니, 어김없이 답이 온다. 어김없이 올뿐더러, 우리가 이리 가까운 사이였나 싶을 만치 답글들이 다정하다.

3주일째 격리돼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을 하고 한 차례 식료품을 사러 다녀왔을 뿐이라는 스위스 노교수도, 노부모가 위중한데 도시가 봉쇄돼 이제 가볼 길이 없다는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교수도, 집에 꼼짝 않고 있는데 고마운 이웃 젊은이가 식료품을 사다줘 가까스로 버틴다는 독일 뮌헨의 노스승도, 일이 늘어 하루 10시간 넘게 모니터 앞에 앉아 네댓 차례씩 영상회의까지 해가며 재택근무를 한다는 워싱턴의 제자도, 비슷한 상황인 실리콘밸리의 청년도 모두모두-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보낸 메일보다 몇 곱절 긴 답을 보내온다.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대 교수의 만지장서 같은 답은 더욱 절절하다. 받은 몇 마디 인사말이 "천사의 음성" 같았단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사회적 거리, 지리적 거리를 마음으로 지우면서 생겨나는 서로에 대한 이런 애틋함이 귀하다.

이 귀한 시간과 앞으로의 어려운 시간에 무얼 해야 할까도 많이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위기의 시기에 나왔던 아름답고 귀한 책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괴테 전집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막스 베크만이 독보적인 삽화를 그린 '파우스트'본, 1차 대전 직후 영국에서 나온 너무도 아름다운 '파우스트'본 등. 베크만의 삽화는 2차 대전 중 덴마크 해변까지 막막하게 쫓겨가 있던 유대인 화가에게 누가 책 한 권(파우스트)을 건넴으로써 그려졌고, 후자는 제아무리 고전이라 해도, 영국인에게는 방금 1차 대전에서 생사의 교전을 끝낸 적국의 문헌인데 지극정성으로 만들어진 고운 판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런 책을 읽고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대전 중 병사들의 배낭에 어김없이 들어 있었다는 책들도 겹쳐 떠오른다. 어디 이 낯선 예들뿐이랴. 겪은 고난과 야만에 맞서 되찾아야 할 인간의 품위와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남은 시간 무얼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할까. 거품을 빼고 꼭 해야 할 일, 남겨야 할 것들을 좀 더 생각하게 된다.

닫힌 문으로도 봄은 어김없이 밀려든다. 매화가 피고 벚꽃이 피고 새들이 요란하다. 보름달은 대낮같이 밝다. 하늘도 공기도 황송하리만치 맑다. 당장만이 아니라 길어질 것 같은 질병, 그 후에 닥쳐올 경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야 암울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우선 이겨내고 그다음에도, 이런 맑음을 다시 더럽히지 않고 지켜나가는 지혜를,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본주의적 삶의 거품을 걷어내는 지혜를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것의 값으로, 아니, 상(賞)으로 가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사회적 거리'-이 물리적 거리가 행여, 결코, 마음의 거리로 남지는 않았으면 한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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