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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공기단축·시너작업·부실시공…이천참사 생존자가 제기하는 3가지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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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장서 작업했던 생존자가 제기하는 ‘사고 원인’



경향신문

유가족들이 지난 12일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참사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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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경기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참사 생존자다. 사고 당일인 지난 4월29일엔 지하 2층에서 냉동창고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천장 부근에서 불이 붙은 것을 목격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출입문이 화염에 덮였다. 검은 연기가 밀어닥쳤다. ㄱ씨는 “같은 장소에서 작업하던 친동생과 함께 출입문 쪽으로 달려나왔지만 뒤따라오던 동생은 결국 사망했다. 불과 2~3초 안에 생사가 갈렸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언론에 알려진 사고 원인은 “‘우레탄뿜칠’(우레탄폼 분사 작업) 도중 생긴 유증기에 원인 미상의 불씨가 붙으며 발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ㄱ씨는 19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의문점들을 제기했다. 모두 원청과 발주처의 안전관리 소홀과 관련된 내용이다. ㄱ씨는 경찰, 소방당국,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등 7개 기관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에도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 무리한 공기 단축 요구했나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는 이번 참사에 민형사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매일 공정률을 보고받긴 했지만 시공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원청인 건우가 결정했다는 것이다. 한익스프레스는 합동분향소에 걸린 플래카드에 사명을 빼달라고 요구해 유가족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만난 현장 관계자들은 “한익스프레스로부터 6월30일로 예정된 완공일을 한 달 정도 앞당기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ㄱ씨는 “현장에 투입됐을 때는 앞선 작업들의 진행이 늦어져 있는 상태였다. 정확한 시점은 알지 못하지만 발주처로부터 공기 단축 요구가 있었던 것은 맞다”고 했다. 또 다른 하청업체 현장관리자도 “발주처가 한 달 정도 공사 기간을 단축해달라고 요구했다고 들었다. 현장에 투입됐을 때부터 ‘공사를 빨리 끝내달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고 했다.

공기 단축 요구가 사실로 확인되면 한익스프레스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전기, 도장, 엘리베이터 용접 등 서로 다른 공정을 맡은 7개 업체가 한꺼번에 ‘혼재 작업’을 한 것이 이번 참사의 원인들 중 하나인데, 이것이 발주처의 공기 단축 요구와 관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합동조사단 관계자는 “우레탄폼부터 담배꽁초까지 다양한 사고 원인들이 나오고 있지만 7개 업체가 한꺼번에 작업하다보니 현장은 난장판이었다. 스티로폼부터 비닐까지 여러 자재들이 널려 있다. 점화원을 찾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라며 “총체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재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게 진짜 문제”라고 말했다.

이근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국장은 “공기 내에 작업을 하지 못하면 원청 시공사가 발주처에 거액의 지체보상금을 물어야 한다.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안전지침을 어기고 동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 시너류 작업 있었나

언론에서는 우레탄폼이 유증기 생성의 거의 유일한 원인처럼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밀폐된 작업 환경을 폭발 직전의 상태로 만든 것은 우레탄폼뿐만이 아니었다.

ㄱ씨에 따르면 불길이 넘어온 지하 1층에선 우레탄뿜칠 외에 도장 작업도 하고 있었다. 도장 작업에 사용되는 페인트에는 시너의 주원료인 ‘톨루엔’ 같은 가연성 물질이 포함돼 있다. 밀폐된 냉동창고에서 도장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이때 생긴 유증기로 불길이 삽시간에 퍼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원청 시공사인 건우가 작성한 작업일지를 보면 도장 작업을 맡은 하청업체는 사고 당일 지하 1층에서 우레탄뿜칠을 한 것으로 돼 있다. 다만 세부 작업 내용에 페인트류를 사용한 도장 작업을 했다는 내용은 빠져 있다.

ㄱ씨는 “당일 우레탄폼 작업자는 두 명뿐이었다”며 “건우 측은 지하 1층에서 작업하던 나머지 두 명이 지상 3~4층에서 대피하다 불이 가장 거센 지하 1층으로 들어왔다고 해명한다. 말이 맞지 않는 해명”이라고 했다.

합동조사단도 이러한 진술을 확보했다. 다만 조사단은 서로 다른 7개 업체가 뒤섞여 ‘혼재 작업’을 하고 있었던 만큼 시너류를 사용한 다른 작업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실제 시너류 사용은 앞선 유사 사고의 직접적인 화재 원인이었다. 2008년 이천 코리아2000 냉동창고 화재는 배관에 보온대를 싸매는 과정에서 사용한 150㎏의 접착제(본드)가 화근이었다.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학과 교수는 “정확히 10년 주기로 비슷한 냉동창고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며 “환기 장치로 공기를 주입해 유증기 농도를 낮추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 문제”라고 했다.

■ 불길은 왜 빨리 번졌나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삽시간에 불길이 번진 것도 의문점이다.

ㄱ씨는 ‘부실시공’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물류창고는 공장에서 제작된 바닥과 기둥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방식(PC조립)으로 지어졌는데, 바닥과 기둥의 이음매를 콘크리트가 아닌 불에 잘 타는 소재로 마감했다는 것이다. ㄱ씨는 “이 부분을 콘크리트로 메웠다면 지하가 아닌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국장은 “일반적으로 접합 부분을 마감할 때는 불에 잘 타지 않는 불연성 또는 난연성 소재를 사용한다”면서도 “다만 이 물류창고는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접합 부분) 마감이 잘 되어 있지 않았을 수 있다. 콘크리트 등으로 마감되지 않은 단열재는 불에 잘 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밀폐된 공간에 쌓인 유증기로 인해 불길이 빠르게 퍼졌을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이 국장은 “현장에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면, 이 엘리베이터가 유증기가 오가는 ‘굴뚝’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천 |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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