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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먹는 것 가지고 갈라진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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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후 거세진 '식량 민족주의']

봉쇄령으로 식품 소비 확 줄자 정부가 '자국 농가 살리기' 나서

벨기에 감자·프랑스 치즈 등 대표 농산물 소비 촉진 운동도

EU 핵심인 '단일 시장' 흔들릴 우려

"우리 농가를 돕고 '음식 주권'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산 먹을거리를 사달라."

디디에 기욤 프랑스 농업 장관이 지난 13일 라디오 채널 RTL에 출연해 가급적 자국산 농산물을 사달라고 프랑스인들에게 요청했다. 그는 "'먹을거리 애국주의'에 호소한다"며 "토마토를 산다면 프랑스산이 스페인산보다 비싼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랑스산을 선택해주기를 부탁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유럽 각국이 자국 농가와 식품업계를 살리기 위해 '국산 먹을거리'를 우선적으로 소비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가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지난 3월 중순 이후 유럽 내 거의 모든 지역의 식당·카페에 영업 금지령이 적용됐고, 이에 따라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판로가 막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 관광객이 끊기고 각종 축제가 취소된 것도 치명타가 되고 있다. 그래서 각국 정부와 농민단체들이 '유럽판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며 자국 농가를 살리자고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EU(유럽연합)의 농업 종사자는 2000만명에 달하며 한 해 농·축산업 생산량 규모는 4000억유로(약 536조원)에 달한다.

요즘 유럽 각지에서는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 농산물 소비를 늘리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차(茶) 마시기를 권장한다. 벨기에에서는 감자튀김을, 프랑스에서는 치즈를 더 먹자고 독려하고 있다. 영업 금지령이 내린 기간에도 프랑스에서는 와인 가게가, 벨기에에서는 감자튀김 상점이 정부 배려에 따라 예외적으로 문을 열 수 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강력한 '국산 보호주의' 정책도 가동되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카르푸를 비롯한 프랑스 대형 마트들은 프랑스 농장들이 파는 신선식품 매입을 늘렸다. 정부의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농업 종사자들이 긴급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게 주선하면서 정부가 1억유로(약 1340억원)에 달하는 지급 보증을 섰다. 이탈리아는 농민뿐 아니라 어민들에 대해서도 1인당 12만유로(약 1억6000만원)까지 지급 보증을 약속했다.

생계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정부를 압박하기도 한다. 잉글랜드농민연합의 미넷 배터스 회장은 영국산 농산물을 정부가 책임지고 100% 매입해줄 것을 요구했다. 포르투갈, 그리스, 불가리아 등에서도 정부 비축량을 늘려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이 같은 자국 중심주의가 대두하면서 EU 회원국 간에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폴란드 정부는 최근 15개 우유 수입 가공업체의 명단을 공개했다. 폴란드산 우유를 구매하지 않고 인근 국가에서 들여온 업체들의 '비(非)애국적 행위'를 성토하며 망신을 준 것이다. 그러자 폴란드낙농협회가 성명을 통해 "우유 수입보다 수출이 더 많은 상황에서 외국산 우유를 차별한다면 손해가 더 클 수 있다"며 정부의 명단 공개를 반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미 '식량 민족주의'가 EU의 핵심 토대인 '단일 시장(single market)'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U 전역에서 조건이 같은 하나의 시장을 추구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화훼·채소·감자 농가를 돕겠다며 6억5000만유로(약 8700억원)의 긴급 지원금을 풀었다. 그러자 스페인에서 "재정 여유가 있는 네덜란드가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불만이 제기됐고, 이에 대해 네덜란드 농민단체가 "지원금 덕분에 더 많은 네덜란드산 농산물이 출시돼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반박했다. 네덜란드뿐 아니라 핀란드, 라트비아도 정부 보조금을 지급했다. 율리아 클뢰크너 독일 농업 장관은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소비 민족주의'가 유럽의 힘을 약화시킨다"며 "자국 산업 보호정책을 모두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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