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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노동도 수행… 자급자족하며 도시와 교류하는 게 사찰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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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가 꽃피는 세상] - 쌍계사의 울력

스님들이 관리하는 땅만 3만 평… 콩-감자-차 등 작물 직접 재배

잠시도 쉬지 않는 ‘불식촌음’ 전통… 방장 고산스님의 가르침 지켜

동아일보

쌍계사 스님들이 사찰 내에서 대형 가마솥부뚜막을 만들고 있다. 밭에서 땀 흘리고 때로 농기구를 쓰며 손에서 잠시도 일을 놓지 않는 ‘불식촌음(不息寸陰)’의 삶이 쌍계사의미래를 만들고 있다. 쌍계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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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 고승으로 유명한 백장 선사(720∼814)의 일화다.

선사는 90세에도 다른 이들처럼 일을 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가 그의 노동을 그만두게 하려고 농기구를 감췄다. 선사는 일을 하지 못하자 하루를 굶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답했다. 수행에 달리 형식이 없고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례다. 일은 사람들에게 삶의 한 방편인 노동을 뜻하나 사찰에서는 수행의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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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력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하는 육체적 노동을 의미하는데 절집에서는 여러 사람이 기를 모으거나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運力) 또는 운력(雲力)이라고 한다.

경남 하동 쌍계사는 울력의 전통이 강하다. 쌍계총림 방장인 고산 스님(87)이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과 승려들에게 계를 내리는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지낸 스님은 드물게 선교율(禪敎律)을 두루 갖춘 원로이자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와 ‘지리산 무쇠소’로 불린다. 1975년 쌍계사 주지로 부임한 뒤 가람을 정비하면서 농사를 지어온 ‘농사의 달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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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스님은 기자에게 불쑥 “호박 키우는 재미를 아냐”고 물었다. 서울 촌놈이 이를 알 수 있으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스님이 답했다. “한 구덩이에서 호박 한 줄기에 다섯 개씩, 다섯 줄기면 5 곱하기 5 해서 25개, 이걸 다시 열 차례 따 먹으면 한 해가 가요. 사람들이 이 재미를 잘 몰라요. 허허허.”

“요즘도 당신(고산 스님)께서 다 해요. 오늘은 미나리 풀매라, 내일은 뭐 해라(웃음)…. 건강이 예전만 못하고 부천에 계셔 농사일을 직접 못하지만 전화로는 다 하시는 셈”이라는 게 주지 영담 스님의 말이다.

쌍계사에 따르면 주변 밭과 차밭이 10만 m²(약 3만 평)가 넘는다. 벼농사는 어렵지만 고추, 옥수수, 콩, 배추, 무, 고사리, 호박, 오이, 감자 등 온갖 작물을 심는다. 차 시배지(始培地)는 1000년 동안 이어진 토종 야생차밭이다. 2만6000여 m²(약 8000평)의 차밭에서 한 해 녹차 300kg, 발효차 250kg이 나온다.

선교율과 차, 범패의 근본도량인 쌍계사의 미래 모습은 울력, 스님들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도시인들과 나누는 생산불교(生産佛敎)다.

최근 찾은 쌍계사는 고산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수행과 일을 통해 잠시도 쉬지 않는 불식촌음(不息寸陰)의 도량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큰 사찰에는 대중의 상징처럼 큰 가마솥이 있기 마련인데 쌍계사에는 없었다. 최근 울력을 통해 가마솥부뚜막이 생겼고, 좁은 장독대가 넓혀졌다. 3년 전 기증 받은 트랙터 등 농기계도 수리하고 사용이 가능하도록 정비했다. 북한 돕기 운동에 적극적인 윤여두 동양물산기업 부회장이 기증한 것과 사찰에서 구입한 것인데 그동안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쌍계사에는 강원 등에서 경전과 수행을 배우는 학인(學人) 스님을 비롯해 제철에는 20여 명, 스님들이 선방에서 집중 수행하는 결제 기간에는 50여 명이 있다. 선방 수좌들도 1, 2시간씩 울력에 참여해 불식촌음의 전통을 바로 세울 계획이다.

영담 스님은 “신도들에게만 의지하는 사찰, 나아가 종교는 살림살이뿐 아니라 수행 기풍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며 “사찰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이를 도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찾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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