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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영웅 아닌 이들로 소설을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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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삐에르와 장

기 드 모파상 지음, 정혜용 옮김/ 창비(2012)


한겨레

한국 독자가 기억하는 모파상은 단편 ‘목걸이'와 첫 장편 <여자의 일생>의 작가다. 그와 함께 두 번째 장편 <벨아미>도 수년 전에 여러 종의 번역으로 출간돼 모파상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했다. 단편작가로서 세계적인 명망을 얻었지만 모파상은 여섯 편의 장편도 남긴 작가다. <여자의 일생>이나 <벨아미>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삐에르와 장>(1888)도 그중 하나로 빼어난 문체와 형식미를 자랑하는 수작으로 꼽힌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품의 분량인데, 단편보다는 물론 길지만 당시 통상적인 장편소설보다는 짧은 편이어서 모파상 자신이 서문 격으로 실린 ‘소설’이란 에세이에서 ‘짤막한 소설’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는 모순적이지만 ‘짧은 장편소설’에 해당한다. 모파상이 작품과는 별개로 소설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에세이 ‘소설’인데, 사실 <삐에르와 장> 역시 모파상 소설의 특징에 대한, 더 나아가 소설 장르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줄거리는 간단한 편이다. 파리에서 보석상을 하던 아버지 롤랑은 연금생활이 가능하게 되자 곧바로 가게를 접고 아내와 함께 노르망디의 르아브르에 정착한다. 항해와 낚시에 대한 넘치는 애정 때문이었다. 다섯살 터울의 두 아들 피에르와 장은 그 사이에 학업을 마치고 각각 의사와 변호사로서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들 가족이 로제미유라는 젊은 미망인과 교제를 갖게 되는데, 미혼의 피에르와 장은 둘다 그녀에게 관심을 쏟는다. 통상 그렇듯이 형제는 우애와 함께 경쟁심도 품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롤랑 부부가 파리에서 친구로 지냈던 마레샬 씨가 사망하면서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로 장을 지정한다. 형제 중 한 명만 특정한 것이기에 특이한 일이었지만 피에르만 제외하고 롤랑의 가족은 의심 없이 기뻐한다. 피에르는 동생의 횡재를 질투하면서 차츰 어머니와 마레샬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추궁 끝에 어머니가 그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고백을 받아낸다. 아들 장에게 어머니는 마레샬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었다고 토로하고 형 피에르로부터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피에르는 가족과 작별하고 주치의로 미국행 유람선에 오른다. 장은 로제이유 부인과 결혼을 약속한다.

이 ‘짤막한 소설’은 어떻게 가능했던가. 두 가지 경로가 가능하다. 단편소설을 확장하는 것과 장편소설을 축소하는 것. <삐에르와 장>은 단편소설을 확장한 쪽에 가까운데 두 주인공 피에르와 장의 심리를 묘사함으로써 모파상은 서사의 분량을 늘렸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사회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묘사하는 대신에 한 가족의 이야기만을 다룸으로써 서사의 범위를 축소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핵심 특징이 인물의 심리 묘사에 있다는 점은 주인공들이 영웅성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인물이라는 데서도 확인된다. 만약 작가가 심리 대신 행동만을 묘사했다면 소설의 분량은 중편 이하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즉 피에르와 장 형제는 장편소설을 이끌어나갈 만한 주인공의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피에르는 어머니의 부정을 응징하려 나서지 않으며, 장은 온당하지 않은 유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에서 예기치 않은 유산 상속으로 빚어진 형제간의 불화와 어머니의 숨겨진 비밀 이야기는 장편 서사의 동력으로 부족하다. <삐에르와 장>은 ‘변변찮은 인물들로 장편소설 쓰기’의 어려움과 노하우를 알려준다.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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