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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근대성 담론은 쓸모없는 시도” 제임슨의 급진적 근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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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의 근대성과 모더니즘에 대한 해체적 분석

“자본주의 생산양식 문제삼지 않는 근대성 담론 넘어 유토피아 꿈꿔야”

단일한 근대성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황정아 옮김/창비·1만8000원


한겨레

미국의 문화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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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86)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미국의 철학자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으로 문화이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제임슨은 다작의 저술가이기도 한데, <정치적 무의식>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여러 종이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 이번에 번역된 <단일한 근대성>은 2002년 출간될 당시 학계의 뜨거운 쟁점이었던 ‘근대성’ 문제에 개입해 이 담론의 계보를 추적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담은 저작이다.

한겨레

제임슨의 기본 관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대표작인 <정치적 무의식>(1982)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마르크스주의자답게 제임슨은 사회를 떠받치는 토대로서 생산양식에 입각해 문학·예술 같은 상부구조를 이해한다. 마르크스의 고전적 정식을 따르면, 생산양식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그 생산양식이 극복되기 전까지는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깊어진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그 모순에 집단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데, 이런 ‘무의식’이 드러나는 장이 바로 문학과 예술이다. 제임슨은 문학과 예술이 프로이트가 말한 ‘꿈 작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체제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시도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봉착하는 문제를 꿈을 꾸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듯이, 문학과 예술도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과 예술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모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봉쇄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유토피아적으로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주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제임슨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사회적 담론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토대, 곧 생산양식을 논의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를 장악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확고히 발을 딛고 서서 사회 담론들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 제임슨의 생각이다.

<단일한 근대성>에서도 제임슨은 이런 관점을 전제하고서, 근대성 담론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근대성 담론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전개돼 왔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근대(모던)의 기점을 언제로 잡느냐는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삼는가 하면, 철학계에서는 17세기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혁명을 기점으로 삼는다. 역사학에서는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가 하면,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근대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제임슨은 이 책의 1부에서 이런 근대성 담론들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가 보기에, 근대성을 이야기하는 숱한 담론들은 사태 자체를 적확한 개념으로 포착한 것이라기보다는 몇몇 사실들을 얼기설기 엮어 그럴듯하게 짜낸 서사(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임슨이 바탕에 깔고 있는 생각은 근대라는 것은 단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빼놓고 근대성을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야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다. 그러니 ‘다수의 근대성’이란 있을 수 없고 근대성이란 단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은이의 근본 관점이다.

한겨레

제임슨은 제2부에서 그 근대성 문제가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난 양상, 다시 말해 ’모더니즘’이라는 문예사조를 검토한다. 지은이는 앞서 1980년대 초에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는 글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후기에 나타난 모더니즘적 실천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 책에서 제임슨은 모더니즘을 세 시기로 구분한 뒤,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같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기에 등장한 모더니즘을 ‘본격 모더니즘’이라고 부르고,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냉전과 함께 등장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나 사뮈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의 모더니즘을 ‘후기 모더니즘’이라고 칭한다. 이어 1960년대 말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 모더니즘 양식들 가운데 이 책에서 논의가 집중되는 것이 ‘후기 모더니즘’이다. 후기 모더니즘이 널리 알린 모더니즘 슬로건은 ‘예술의 자율성’이다. 제임슨은 예술의 자율성이란 후기 모더니즘이 앞 시기 ‘본격 모더니즘’을 모방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적 실천을 옹호하려고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제임슨이 자율성 담론에 맞세우는 것은 ‘예술의 반(半)자율성’이다. 토대인 생산양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도 않고 토대에 완전히 얽매여 있지도 않은 중간 영역에 문학이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근대성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고찰하는 데는 어느 정도 수용할 만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미래의 기획으로 제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쓸 무렵 많이 등장했던 ‘대안 근대성’ 같은 것이 이런 미래 기획인데,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말하는 ‘급진적 근대성’이 대표적인 경우다. 기든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근대성의 결과들이 전보다 한층 급진화하고 보편화하기 시작하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기든스의 주장은 결국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제3의 길’을 찾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하는 ‘미완의 근대성’이라는 담론도 근대성을 완성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이런 담론들은 근대성의 근본적 의미 곧 ‘전 세계적 자본주의’를 간과하고 있다. 제임슨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문제를 건너뛰는 근대성 담론은 참된 대안이 될 수 없다며 “근대성 담론을 재발명하려는 쓸모없는 시도는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은이의 관심은 근대, 곧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필요한 상상력의 힘을 찾는 데 쏠려 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욕망으로 근대성이라는 주제를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일이다.” 이것이 지은이가 복잡한 논의 끝에 내놓는 마지막 결론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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