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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뉴딜? 문재인과 루즈벨트의 결정적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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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1929년 가을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촉발된 대공황 때 미국 대통령은 허버트 클라크 후버(재임 1929.3.4-1933.3.4)였다.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데도 후버 행정부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자제하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고집했다.

정부의 강제와 간섭을 반대하는 '자발주의(volunteerism)'를 신봉하며 개인주의라는 미국식 이상을 토대로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 금융자본의 투기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에 따른 주식시장의 과열이 미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발신되었으나 후버 행정부는 둔감했다.

후버, 실업 구제는 자선단체의 임무

1929년 10월 '검은 화요일'이 닥치면서 후버 행정부의 자유방임주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도와 전력 등 인프라 건설과 유지를 위해 정부 지출을 늘렸고, 연방준비은행은 이자율 인하를 발표했다. 1930년 초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은 1억 달러 농업 지원금을 승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후버 행정부는 실업자를 위한 연방 정부의 지원에는 반대했다. 실업자 대책은 자선단체나 지방정부가 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1930년 말 실업률이 11%를 넘어섰고 주식 투기에 몰두했던 은행들의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세계적 대공황 상황에서 통화 위기에 빠진 영국을 필두로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하지만 후버는 금본위제 이탈을 '집산주의(collectivism)'라 비난했다.

루즈벨트, 실업자 구제를 들고나와

1931년 중반 실업률이 15%를 돌파하면서 미국 경제가 침체를 넘어 공황으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후버의 연방정부가 실업자 구제에 나서길 머뭇거리는 사이,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욕 주 정부는 실업자 지원을 위해 비상구호청을 신설했다.

더욱 나빠지는 경제 상황은 실업자에 무관심한 후버와 실업자에 동정적인 루즈벨트라는 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대선의 재선이 확실시되던 후버의 입지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1932년 실업률이 23%에 이르자 후버 행정부는 연방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할 필요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건금융공사(RFC), 연방주택대부은행(FHLB),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만들어졌고, 중앙은행으로서 연방준비제도(FRS)의 역할과 권한을 강화하는 '글라스-스티갈 법'이 통과되었다.

후버 행정부, '재정 건전성' 포기

1931년 연방정부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자 후버 행정부는 '재정 건전성'에서 증세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1932년 6월 후버가 서명한 세법은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을 25%에서 63%로 세배 가까이 인상했고, 부동산보유세와 법인세도 덩달아 올렸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부가 돈이 있어야 한다(the government must have money)"는 평범한 상식을 후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7월 후버는 자신의 자유방임주의 철학에 반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재건금융공사법을 강화한 비상구호건설법에 서명함으로써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연방 정부가 공공근로(public work) 사업을 펼쳐 실업자 구제에 나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대공황이라는 현실의 역동적인 변화가 후버의 경직된 신념을 박살 낸 것이다.

1932년 6월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후버를 대통령 후보로 승인했다. 98%의 대의원이 후버를 지지했다. 전당대회는 균형 재정, 즉 '재정 건전성'에 당의 충성을 재천명했으나,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뉴딜'의 지적 재산권은 후버의 것

1932년 7월 역시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네 번에 걸친 투표를 거쳐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대통령 후보로 선정했다.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미국민을 위한 뉴딜"을 다짐했다. 1933년 3월 4일 루즈벨트는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같은 날 시작된 제73대 미 의회의 상·하원은 모두 민주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경제적 파국을 맞아 국제 무역과 국민 경제의 토대를 이루던 금본위제가 붕괴되었고,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 정책을 버리고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29년 대공황기 이후의 사태 전개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뉴딜이 사실은 후버 행정부가 펼친 정책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의 시장 개입, 금융 개혁, 기업 활동 규제, 세금 인상과 공공근로 사업을 통한 실업 구제 정책의 '지적 소유권'이 있다면 그것은 루즈벨트가 아닌 후버에게 돌아가야 한다.

거칠게 말하면 대공황을 극복하려는 후버의 정책들이 루즈벨트의 '뉴딜'로 재포장된 것이다. 만약 1932년 미국 대선에서 후버가 재선되었더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루스벨트의 '뉴딜'과 비슷한 정책들은 집행되었을 것이다.

노동권과 노동시간 단축, 후버 행정부가 간과한 문제

그렇다면, 후버의 '뉴딜'과 루즈벨트의 '뉴딜'은 차이점이 없을까. 물론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후버의 정책에는 없고 루즈벨트의 정책에만 있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노동 뉴딜(Labor New Deal)'이다. 혹자는 '주고받기(give and take)'라는 형태의 허접한 한국식 노동 개혁이나 사회적 대화를 떠올릴지 모르겠으나, 루즈벨트의 노동 개혁은 전혀 달랐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가 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 1945년 루즈벨트가 사망할 때까지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대학 교수로 일하던 퍼킨스는 1911년 3월 미국 뉴욕의 봉제공장 화재로 노동자 146명이 불타 죽은 사건을 계기로 산업 안전·근로조건 개선·노동권 향상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29년 루즈벨트가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자 퍼킨스는 1800명을 통솔하면서 뉴욕 주의 노동 정책을 책임지는 산업정책관(industrial commissioner)에 임명되었다. 공장에 대한 근로 감독이 확대되고, 주 48시간 상한제가 도입되고, 최저임금제가 실시되고, 실업보험이 만들어지고, 아동노동이 금지되었다. 특히 취약계층인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정책들이 입안되고 집행되었다.

최초의 여성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의 활약

1932년 가을 대선에서 승리한 루즈벨트는 퍼킨스에게 자신의 내각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퍼킨스는 사회보장 제공·노동조합 권리 확대·최저임금제·하루 8시간 노동제 등 "미국에서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정책안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들고 갔다.

이후 전국산업부흥법, 전국노동관계법, 공정근로기준법, 사회보장법이 만들어짐으로써 뉴욕 주에서 집행되던 친노동 정책들이 연방정부로 확대되었다. 노동자의 노조 결성권(단결권)이 강화되고, 사용자의 단체교섭 의무 및 부당노동행위 금지 등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이 확립되었다. 또한 파업 등 단체행동에서 노동조합의 민사상 책임을 면제하였다.

이로써 자본가들이 임금과 노동시간 등 근로조건의 결정과 고용 및 해고의 자유 등 '인사 경영권'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던 '야만의 시대'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장과 사무실 안으로 민주주의가 들어옴으로써 '일터의 문명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 역행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관료와 재벌

100여년 전 대공황과 비교할 때 문재인의 뉴딜은 루즈벨트의 뉴딜보다는 후버 행정부 초기의 '시장 자유방임주의'에서 후기의 '국가 개입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와 닮았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관료들은 부자와 기업에 대한 과세를 방해할 목적으로 '균형 재정'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재정 건전성'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전경련과 경총 등 재벌과 자본가의 이익집단들은 노동조합 권리의 축소, 단체교섭권의 훼손, 장시간 노동의 허용, 사용자의 해고 권리 확대, 부자와 기업에 대한 감세, 산업 안전 보건에 대한 규제 철폐 등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가 확인된 시대에 뒤처진 요구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Post-COVID19)'의 세계를 준비하자면서 뉴질랜드 총리가 '주4일 노동제' 도입을 통한 일자리 공유를 주창하고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핀란드의 기본소득제 실험이 국민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실험 참가자들의 삶의 질과 인간적 자존감을 높였다는 소식도 들린다.

후버를 떠올리게 하는 문재인의 '뉴딜'

퍼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기의 시대에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특단의 조치들이 필요하다. 그 첫 대목에는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규정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통한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등 취약 노동자층 권리 강화, 그리고 현행 근로기준법이 보장한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과 주 40시간 노동제의 실현을 통한 일자리 공유, 기업과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한 사회복지 확대가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루즈벨트의 역사적 '뉴딜'은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는 관료 출신 장관들이 마지못해 나오는 '주고받기' 식의 어설픈 '사회적 대화'라는 형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노동권 개선과 사회보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개혁가를 장관에 임명하고 그의 개혁 드라이브를 지지하고 추동하는 방식, 즉 의지도 없고 실력도 부족한 노사정 3자 간의 합의를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토대로 대통령과 여당이 앞장서는 방식으로 노동 개혁을 집행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 안팎의 비상한 상황을 고려할 때, 국회에서는 극우 정당의 지지와 사회적 대화에서는 노사정 간의 어설픈 타협에 의존하려는 문재인의 '뉴딜'은 루즈벨트 행정부의 비상한 '뉴딜'보다는 후버 행정부 후기 한물간 대응에 가깝다.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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