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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고대왕국’ 익산에서 만나는 ‘백제의 로미오와 줄리엣’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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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향기’ 가득한 익산여행 / 백제무왕과 신라공주 / 국경 뛰어넘은 사랑 / 설화 품은 미륵사지 / 절터 한켠 석재들 가득 / 무왕이 이루지 못한 / 백제 부흥의 꿈 느껴져 / 연못 건너 광활한 공터 / 서탑·동탑 대화하는 듯 / 무왕의 유산 왕궁터 오층석탑이 여행자들 반겨… 함벽정 오르면 왕궁저수지… 소나무숲 정자에 앉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여 / 5㎞ 넘게 이어지는 성당포구마을 바람개비길 어디서 찍어도 화보… 3500여개 항아리 이어진 ‘고스락’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백제의 향기 가득한 익산여행/무왕과 선화공주 국경 뛰어넘은 사랑/미륵사지 마주보는 두 석탑 서동과 선화 같구나/무왕 유산 왕궁터 오층석탑 여행자들 반겨/함벽정 오르면 왕궁저수지 가슴이 탁 트여/용안 성당포구마을 바람개비 길 어디서 찍어도 화보/3500여개 항아리 가득 고스락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이탈리아 베로나 줄리엣의 집. 여행자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줄리엣 동상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기 위해서다. 그러면 늘 행운이 따른다는 말을 믿고 남녀 가릴 것 없이 오랫동안 기다려 인증샷을 찍는다. 2층 테라스는 입장료 6유로를 내야 하지만 여친은 줄리엣처럼 포즈를 잡고 남친은 사랑하는 이를 올려다보며 렌즈에 담느라 바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은 소설 속 이야기지만 줄리엣의 집에 들어서면 실화가 돼버리니 이야기의 힘은 참 대단하다. ‘백제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있다. 서동요를 통해 맺어진 무왕과 선화공주다. 설화지만 둘의 사랑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사실적이다. 그들의 흔적이 속속 베일을 벗고 있어서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곳, 고대왕국 백제의 향기 가득한 전북 익산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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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연못에서 본 서탑과 동탑


#미륵사지에서 고대 백제왕국을 만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서동요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어수업과 시험에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다. 절세미녀인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연모한 백제의 서동(薯童)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통해 퍼뜨렸고 선화공주의 행실에 진노한 진평왕은 그녀를 귀양 보낸다. 서동이 길목에서 기다리다 백마 탄 왕자처럼 그녀를 구하고 백제로 건너가 결혼에 골인한다는 얘기다. 서동이 백제의 30대왕 무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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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서탑과 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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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 선화공주 소왕릉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와 백제는 원수지간이라 이런 혼인은 이뤄질 수 없다거나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의 딸이 통혼한 사실이 와전됐다고 한다. 반대로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던 시기에 이뤄진 백제와 신라의 정략결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무왕은 지방 호족의 세력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갖지 못하자 부여에서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고 왕권강화를 위한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얘기란다. 백제가 멸망하자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려고 마치 신라가 미륵사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설화를 지어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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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서탑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연못 건너에 광활한 공터가 펼쳐져 있고 양 끝에 2개의 탑이 대화하는 듯 서 있다. 날이 좋으니 푸른 하늘과 구름, 산, 나무, 탑이 연못에 똑같이 투영된다. 자연이 빚어낸 데칼코마니가 이처럼 완벽하다니.

미륵사지는 탑 2개가 전부라 첫 이미지는 썰렁하게만 다가온다. 하지만 서탑(국보 11호) 아래 서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웅장한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서탑은 각 층의 지붕 처마가 위로 들려 올라가며 날개처럼 힘차게 뻗어나간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발굴 당시 6층까지 일부가 남아 있어서 석재 1627개를 짜 맞췄다. 높이 14.5m, 폭은 12.5m, 무게 약 1830t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이다. 중앙에는 서탑보다 몇배 규모의 나무탑이 미륵사의 중심을 잡으며 높이 서 있었다고 한다. 동탑인 구층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석재는 유출돼 아예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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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팰리스 조형물


절터 한편 넓은 공터에는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주변처럼 발굴 당시 나온 석재들로 가득하다. 미륵사 복원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절터를 모두 둘러보고 중앙탑이 있던 자리에 서 본다. 하늘을 향해 높게 우뚝 솟은 당간지주 한쌍(보물 236호)을 바라보니 찬란했던 1400년 전 미륵사의 모습이 영화 ‘오페라의 유령’ 첫 장면처럼 빛바랜 흑백에서 컬러 영상으로 바뀌며 눈앞에 펼쳐지는 상상력이 발동된다.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결혼한 뒤 용화산(미륵산) 사자사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길에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이에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실제 미륵사지는 설화와 일치한다. ‘중문-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긴 회랑인 서원·중원·동원으로 건립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 하지만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에는 좀 다른 얘기가 나온다.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 시기인 639년에 창건됐고 창건 인물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자 백제 왕후’라는 기록이다. 서동요 내용이 흔들리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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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을 말하는 듯 전북 익산 미륵사지의 서탑과 동탑이 서로 마주보는 풍경이 연못에 그림처럼 담겨있다.


#죽어서도 헤어질 수 없는 사랑

그렇다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사실이 아닐까. 익산시 석왕동 오금산 서쪽 능선에 있는 쌍릉으로 향한다. 북쪽에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규모의 대왕릉이, 남쪽에는 소왕릉이 다소곳하게 대왕릉을 바라본다. 두 능 사이 180m 길에 도열한 소나무들은 마치 호위무사 같다. 건축시기와 규모로 미뤄 백제시대 왕릉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대왕릉의 주인은 무왕을, 소나무가 주위를 감싸는 포근한 소왕릉은 선화공주를 가리킨다. 같은 시대에 지은 능으로 발굴조사 전에 도굴됐지만 원형의 봉토 주위에 호석을 두른 흔적과 내부 석실, 부패된 목관과 토기 등으로 미뤄 백제 말기 형식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정도 규모를 갖춘 능은 왕과 왕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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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항아리 3500개로 꾸민 고스락은 연인들의 핫플레이스다.


특히 대왕릉에서 출토된 인골 102점 분석 결과 주인은 620∼659년에 사망한 50∼60대 남성이며 고칼로리 식사로 노인성 질환을 앓은 흔적도 나와 역사학자들은 무왕으로 추정한다. 쌍릉 소나무숲 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몰락한 왕족으로 익산에서 마를 캐며 가난한 삶을 살던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 죽어서도 서로만 바라보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절절한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얘기보다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용화산 능선 끝자락에서는 무왕의 왕궁터가 기다린다. 도로명주소도 왕궁면 궁성로라니, 재치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왕궁리 오층석탑이 여행자들을 반기며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를 천천히 들려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은 이곳을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어 무왕의 왕궁터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화장실 유적이 확인됐다. 하지만 격동의 시기이던 7세기에 왕궁까지 지어놓은 익산을 세력의 기반으로 삼아 백제의 부활을 꿈꾸던 무왕의 익산 천도 계획은 귀족세력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결국 백제말이나 신라초기에 왕궁은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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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용안면 성당포구마을 바람개비길. 금강을 따라 하늘색, 노랑, 빨강의 바람개비 꽃이 활짝 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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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정 가는 길 고목 옆 의자에서는 아름다운 왕궁저수지를 즐길 수 있다.


#성당포구 바람개비길 화보가 따로 없네

익산은 찬란한 무왕의 유산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도 품고 있다. 함벽정에 오르면 왕궁저수지가 반긴다. 소나무숲 정자에 앉아 푸른빛이 감도는 드넓은 저수지를 바라보니 가슴이 시원하다. 익산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인데 봄이 되면 만발한 벚꽃과 그림자가 저수지 물 위로 드리워지는 풍경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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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길 포토존


요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주 등장하는 익산의 핫플레이스는 용안면 성당포구마을의 바람개비길. 금강 너머 서천의 신성리 갈대밭을 마주보는 강변을 따라 하늘색, 노랑, 빨강의 바람개비가 꽂혀 있는 길이 무려 5km 넘게 이어진다. 어떤 포즈를 찍어도 화보다. 천천히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빌려 바람개비 길을 신나게 달려도 보자. 저녁이면 돌담장 너머 금강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펼쳐져 대자연에 감사하게 만든다. 웅포 곰개나루의 노을도 ‘금강명월’로 불리는 ‘서해 낙조 5선’의 하나. 잔잔한 강 위를 붉게 물드는 노을이 마치 그림 같다. 금강정으로 오르는 길에서는 노란꽃 창포가 여심을 흔든다.

함열읍 고스락은 연인들이 익산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데이트 성지’다. 전통항아리 3500여개가 마당을 가득 채운 모습이 장관이다. 유기농 원료만 사용해 자연 발효시키는 전통장들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제 기능을 다한 항아리들은 꽃단장을 해 오솔길에 놓였고 항아리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새집도 올려놓아 아기자기한 풍경을 선사한다.

익산=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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