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7 (목)

미 대법원 "낙태 규제 루이지애나주 법 위헌"…보수 우위 대법관 구성에도 낙태 권리 인정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미국 낙태 반대 운동 단체가 29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의 자격을 제한한 루이지애나주 법이 여성들의 낙태 권리를 제한한다며 무효라고 판결했다. 낙태 제한을 적극 지지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처음으로 열린 주요 낙태 관련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이 낙태 권리 옹호론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진보 성향 4명, 보수 성향 5명으로 구성된 연방대법관 가운데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루이지애나주 법 무효 의견에 가세하면서 5 대 4의 결과가 나왔다. 연방대법원은 최근 성 소수자에 대한 고용 및 직장 내 차별 금지,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제도(DACA) 폐지 등과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 및 보수 진영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사건에 대해 세번 연속 진보 진영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날 반경 30마일(약 48㎞) 이내에 낙태 시술소가 2곳 이상 있어서는 안되고,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는 반경 48㎞ 이내 병원에 유효한 ‘환자 입원 특권(admitting privileges)’을 보유해야 한다고 규정한 루이지애나주의 ‘불안전한 낙태 보호법’이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처음으로 인정된 여성의 낙태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환자 입원 특권은 인근 병원에 환자를 이송해 입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뜻한다. 루이지애나 정부는 2014년에 제정된 낙태 규제 법에 대해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낙태 옹호론자들은 낙태를 시술할 수 있는 의사의 자격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이 여성들의 기본권으로 인정한 낙태를 제한한다고 비판해 왔다.

연방대법원은 “이 법은 낙태 시술 제공자의 수와 지리적 분포를 급격히 감소시켜 많은 여성이 주 내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루이지애나주 전체에서 낙태 시술을 제공하는 의사는 5명인데 이중 2명만 환자 입원 특권이 있다. 하지만 2명 중 1명도 이 법이 규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해 이 법이 시행될 경우 루이지애나주 전체에서 낙태를 시술할 수 있는 의사는 1명만 남게 될 처지였다. 뉴욕타임스는 루이지애나주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애리조나주 전체 낙태 시술 건수는 8000건이었다면서 이번 판결로 애리조나주 내 3곳의 낙태 시술소가 계속 운영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연방대법원은 2년 전에도 거의 유사한 내용의 텍사스주 법에 대해 무효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보수 성향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소수의견에서 “오늘 대법원의 다수는 사법관할권 없이 주의 완전히 합법적인 법을 금지함으로써 근거 없는 낙태 법리를 영속화한다”고 지적했다. 캐일리 매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유감스러운 판결”이라면서 “대법원은 엄마들의 건강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생명을 동시에 평가절하했다”고 밝혔다. 매커내니 대변인은 이어 “선출직이 아닌 대법관들이 자신의 정책 선호에 따라 낙태에 찬성해 주 정부의 자주적인 특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성명에서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전국적으로 여러 주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옳은 선택을 할 여성들의 헌법적 권리를 극도로 제약하는 법들을 제정함올서 여성들의 건강권이 공격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의 특징은 2가지다. 2016년 텍사스주 법 재판 당시 합헌 쪽이었던 로버츠 대법원장이 위헌 의견에 가담한 것이다. 다만 로버츠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 동참하지 않고 별도로 낸 의견에서 자신은 루이지애나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선례 구속의 원칙(doctrine of stare decisis)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비슷한 사건들을 같게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면서 “루이지애나 법은 낙태에 대한 접근에 있어 텍사스주 법이 부과한 것과 같은 심각한 부담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자신은 4년 전 내려진 텍사스주 법에 대한 결론이 잘못 내려진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으며, 이번 사건은 사안 자체가 아니라 선례를 고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쟁점이라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로버츠 대법원장은 앞선 판결에서 법원의 일부 분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향후 소송에서 보수 성향 동료들 편을 들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 전역 연방항소법원에 계류된 낙태 관련 사건은 16건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방항소법원은 대법원 이전 심급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지난 15일 성 소수자의 고용 및 직장 내 차별은 위법이라고 판단한 데 이어, 지난 18일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도입한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제도(DACA)를 폐지해야 한다며 제기한 소송에서도 존치 의견을 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지난해에도 인구조사에 시민권 보유 여부를 묻는 질문을 포함시키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뉴욕타임스는 낙태 반대론자들로서는 이번 사건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닐 고서치·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루이지애나법을 합헌이라고 판단함으로써 그들의 ‘진가’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낙태 반대 단체인 ‘수전 B 앤서니 리스트’의 마주리 대넨펠저는 “우리는 11월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낙태에 반대하는 다수를 상원에 재선시킴으로써 사법부, 특히 대법원을 바로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대법관을 포함해 연방법원 판사들을 대통령이 지명하면 상원 인준을 거쳐 임명한다. 대통령과 상원을 낙태에 반대하는 정치인으로 뽑음으로써 장기적으로 사법부 구성을 변화시켜 낙태 금지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대법관을 충원했음에도 트럼프 행정부 시기 첫 낙태 관련 재판에서 진보 진영이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면서 낙태가 대선에서 더욱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