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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정찬의 세상의 저녁]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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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희생을 불러일으킨 사건의 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희생은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밝히는 불빛입니다. 이 불빛이 소중한 것은 미래를 밝혀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쪽을 타자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산천에 묻힌 희생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미래의 우리’와 만날 수 없습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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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ㅣ 소설가

지금 저는 한장의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동해북부선 열차가 통과하던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공현진 터널 안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터널 입구에는 한국전쟁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터널의 끝은 희미한 빛에 잠겨 있습니다. 희미한 빛 저쪽에 북한의 산천이 숨 쉬고 있을 테지요. 이쪽에 있으면 저쪽을 그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리움은 그렇게,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산천에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남북한 철도 연결이 판문점 선언에 담겼을 때 한반도의 산천이 비로소 연결된다는 생각에 많이 설렜습니다. 하지만 설렘은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가 온전히 숨 쉬는 것을 불안해하는 세력들의 견제 때문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판문점 선언을 주체적으로 실천하기를 바랐던 북한으로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6월16일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청사 폭파는 실망의 압축적 표현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북한의 실망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 표현의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의 무너짐으로 냉전체제가 해체되었으나 한반도는 지금까지 냉전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반공이데올로기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반공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력한 권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기반은 전쟁 트라우마입니다. 제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청사 폭파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전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청사 폭파 후 북한의 군사행동 예고와 함께 대남 확성기가 설치되면서 남북관계가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졌습니다. 저는 그런 우려 속에서도 희망을 품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의 근거는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든 김 위원장의 모습과 도보다리 회담, 2019년 2월 평양에서 중국 대륙을 거쳐 2차 북미회담 장소였던 베트남까지의 66시간 ‘열차 대장정’이었습니다.

판문점은 한국전쟁을 표상하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의 중심에 군사분계선이 놓여 있습니다. 전쟁 발발부터 군사분계선 확정까지 3년 동안 한반도는 폐허가 되었고, 폐허에 묻힌 주검들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판문점 군사분계선은 폐허가 된 국토와 폐허 속에 묻힌 주검을 품고 있는 ‘깊은 강’이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래서 꿈의 무덤처럼 한없는 슬픔이 되어버린 그 강을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사뿐히 건넌 것입니다. 분단 트라우마가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우리에게 역사의 중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퍼포먼스였습니다. 새소리와 바람에 쓸리는 숲의 소리만 들렸던 도보다리 위에서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예상보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고, 형과 아우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2019년 2월 김 위원장이 ‘열차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저는 이 지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사후 25년 뒤 북한 체제의 근간인 반미 이데올로기와 핵을 등에 짊어지고 노마드적 ‘대장정’에 나섰다”고 썼습니다. 유목민으로 번역되는 노마드(Nomad)는 특정한 가치와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깨뜨림으로써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창조적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열차 대장정’은 김 위원장이 가고자 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역사적 풍경 속에 숨 쉬고 있었던 담대한 열정은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가슴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김 위원장이 6월23일의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대남군사행동계획 보류를 지시하면서 비무장지대에 설치한 대남 확성기가 철거되었다는 보도를 접한 것은 6월24일이었습니다. 다음날 <한겨레>의 1면 머리기사 제목 ‘북 ‘군사 행동’ 멈췄다…숨 돌린 한반도’를 보고 마음이 시렸습니다. 그날은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에 북한도 담대하게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기념식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7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147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였습니다. 북한에서 발굴한 유해가 미국을 거쳐 남한으로 오기까지 북미 대화, 북미 유해발굴사업, 한미 공동감식 등 남북미 협력의 25년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1990년대 초 북한이 개천시, 운산군, 장진호 일대에서 4년간 발굴한 208개 유해 상자를 미국에 송환함으로써 시작된 전쟁 치유 사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한반도 곳곳에 헤아릴 수 없는 유해가 묻혀 있습니다. 군인들만 죽지 않았습니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죽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무기로 변해 서로가 서로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 모든 죽음들은, 그분들이 생전에 어느 쪽이었든 남북한 모두로부터 추모받아야 합니다.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희생을 불러일으킨 사건의 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희생은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밝히는 불빛입니다. 이 불빛이 소중한 것은 미래를 밝혀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불빛 속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의 시선이 아닌, 다른 쪽을 타자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산천에 묻힌 희생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미래의 우리’와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전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전환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바이러스의 창궐이 오히려 지구 환경을 정화하는 역설의 현상을 체감한 인류는 생태계를 파괴해온 자본주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변화하는 생명체입니다. 자본주의가 인류의 새로운 시선에 의해 변화해야 하듯이 북한의 사회주의도 변화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김 위원장은 깊이 깨닫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판문점 선언과 ‘열차 대장정’이 그런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류사를 들여다보면 위기는 언제나 있었고, 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한 역사의 ‘노마드’들은 위기를 헤쳐 나갈 희망의 근거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제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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