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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트랙터 몰고 북에 전할 때까지 ‘통일쌀’ 계속 키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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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이갑성 전농 광주전남연맹 조국통일위원장

한겨레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조국통일위원장이 2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통일쌀 모내기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가장 힘든 설움이 배고픔이잖아요. 북쪽 동포들이 굶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북한 주민들이 따끈한 밥을 양껏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 올해도 통일쌀을 심습니다.”

26일 전남 함평군 나산면 삼축리의 한 논에서는 함평군농민회 회원과 주민, 공무원 등 70여명이 ‘통일쌀 모내기’ 행사를 열고, 볏모 한 움큼을 손에 쥔 채 다른 손으로 조심스레 심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따금 허리를 펼 뿐 힘든 기색 없이 1.6㏊에 달하는 논 4곳을 초록빛으로 채웠다. 논에서 자란 벼는 올해 가을 수확해 북한으로 보낼 예정이다. 지난달 16일 북한이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군사행동을 예고하는 등 남북 관계가 험악해졌지만, 모와 함께 심은 통일 염원은 흔들림이 없었다.

올해로 13년째 ‘통일쌀 모내기’ 행사를 하는 이갑성(57)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광주전남연맹 조국통일위원장은 28일 “최근 남북 관계가 악화했지만 꾸준히 민간차원에서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통일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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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남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함평군농민회 회원들이 통일쌀 모내기 행사를 하고 있다.함평군 제공


전농 회원이었던 이 위원장은 2000년 텔레비전에서 남북 정상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농민들도 통일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변을 설득했다. 식량난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북한 동포들에게 쌀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민간교류를 넓혀가자고 제안했다.

이 의견에 공감한 전남 각 지역 농민회 회원들은 생산한 쌀의 일정량을 기부했고 민간단체를 통해 북으로 보냈다. 2007년 12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통일쌀짓기운동본부가 북한 개성에서 북측위원회에 쌀을 전할 땐 이 위원장은 직접 1t 트럭에 쌀을 싣고 개성에 가기도 했다. 당시 북에 전달한 쌀 267t 중 전남에서 보낸 양이 205t(76.7%)을 차지할 정도로 전남 농민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2007년 북에 쌀 267톤 지원 계기로

올해로 13년째 통일쌀 모내기 사업

지난달 장흥·영광·함평 등서 모 심어

2009년부턴 지원길 막혀 쌀 못 보내

지난해 ‘트랙터 방북’ 시도도 무산


“개성공단처럼 남북 공동경작이 꿈”

이 위원장은 “당시 트럭에 쌀을 싣고 북한에 도착하니 북한 주민들이 성대하게 환영해줬다. 10년도 더 됐지만 그때의 따뜻함을 잊지 못하고 있다. 사는 지역만 다를 뿐 남북 주민들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2008년부터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통일쌀 모내기 사업’이 시작됐다. 매년 경작지를 선정해 6월에는 모내기, 11월에는 추수 행사를 열어 통일에 대한 관심과 민간차원의 교류를 확대해 가자는 목적이었다. 경작지 대여료, 인건비, 농기계 등은 광주·전남 농민회가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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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통일쌀 경작지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본부 관계자들이 6·15공동선언 20주년 기념 통일쌀 모내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2009년부터 대북 쌀 지원이 중단되며 ‘통일쌀 사업’은 흔들렸다. 쌀을 쌓아두고 2∼3년을 기다려도 민간교류가 재개되지 않자 이 위원장은 쌀을 팔아 수익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쌀을 보내지 못할 바엔 차라리 통일운동자금으로 활용하자는 결단이었다. 지난해 4월에는 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맞아 전국 농민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통일트랙터 33대(16억원 상당)를 몰고 방북을 계획했지만 끝내 무산되기도 했다. 트랙터는 현재 경기도 파주 임진각 주차장에 발이 묶여 있다.

이 위원장은 “트랙터는 얼어붙은 남북 관계, 철조망, 정치적 갈등을 갈아엎자는 의미가 있다. 33대 중 15대를 전남에서 기부할 만큼 지역 호응도 좋았다. 1년째 보내지 못하고 있지만 교류 물꼬가 트이면 당장에라도 북으로 몰고 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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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부터 경기도 파주 임진각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통일 트랙터. 연합뉴스


올해도 전농 광주전남연맹 소속 11개 농민회는 전남 장흥(2일)을 시작으로 영광(15일), 광주(20일), 함평(26일) 등에서 ‘통일쌀 모내기’를 했다. 일부 시민들은 ‘보내지도 못할 쌀을 재배해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지만 이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개성공단처럼 언젠간 남북 농민들이 같은 논에서 농사를 짓는 게 꿈입니다. 남한의 기술로 북한 환경에 맞는 종자를 개발하고 기술 지원도 하면 어렵지 않게 북한 쌀 생산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남북 정부간 교류가 끊겼다고 민간단체도 손을 놓으면 안 됩니다. 트랙터를 몰고 쌀을 전달할 때까지 통일쌀은 계속 경작할 계획입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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