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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손발 묶인 CVC 추진에 기대 접는 스타트업 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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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지주사 계열 투자회사 CVC 허용 조건 가닥
정부·여당 "외부자금 활용 제한하는 식으로 허용" 방향
업계 "안 하느니만 못하다… 투자 활성화 효과 없을 것"
"대기업 자기자본으로 운영하는 책임의식 필요" 지적도

"정권 실세까지 나서서 힘을 실어주길래 뭔가 되나 싶었는데 괜한 기대였나 싶습니다."

최근 만난 한 스타트업 업체 대표의 말이다. 대기업 지주회사가 출자해 운영하는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이 당초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추진되면서 벤처·스타트업 업계에서 낙담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 대주주의 사익 편취를 막는다는 취지로 마련된 각종 규제 때문에 유명무실한 제도가 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조선비즈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코로나19 국난극복위원장이 지난달 11일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업주도 벤처 캐피탈 CVC 활성화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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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계기로 급진전 된 지주사 CVC… 뚜껑 열어보니 ‘반쪽짜리’
CVC는 대기업이 직접 자본을 출자해 운영하는 VC(벤처캐피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금산분리(산업 자본의 금융 소유 금지)’ 원칙 때문에 대기업 지주사가 금융사로 분류되는 VC를 계열사로 두지 못하도록 제한해왔다.

지주사의 CVC 허용은 업계의 오랜 호소에도 지지부진하다가 올해 들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투자 시장이 얼어붙자 이를 타개할 방안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다.

지난달 초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6차 비상경제회의에서 CVC 규제 완화를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중 하나로 추진한다는 내용이 나왔고, 여당 의원들도 21대 국회 출범 이후 잇달아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이어 11일 김병욱·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열린 CVC 활성화 토론회에서는 같은 당 이낙연 의원과 김태년 원내대표까지 참석해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었다. 벤처·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제도 도입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를 내고 있어 기대에 부풀어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다 최근 분위기가 꺾인 것은 지주사 CVC가 외부 자금을 받지 못하는 형태로 허용될 것이라고 예상되면서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5일 지주사 CVC가 투자금을 조성할 때 계열사 또는 자기자본 출자로만 가능하도록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기에 CVC 지분을 지주사가 100% 소유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의원은 "일반적인 VC와 달리 CVC는 그룹적 차원의 전략적 투자 목적이 크므로 외부자금 위탁 운용은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한다"며 규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글 벤처 등 글로벌 CVC 모두 외부자금 없이 지주사 내부자금으로만 투자한다는 점을 참고했다"고 덧붙였다.

CVC 규제 완화 이슈를 앞장 서서 주도했던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대외적으로 "지주사가 100% 투자하는 형태라면 CVC를 허용해도 된다"고 피력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중기부 등에서 마련하는 CVC 관련 정부 발의안에 이 같은 내용이 담기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이 외부자금 없이 자기자본으로만 투자를 해야지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관측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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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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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도 공정위도 난감… "설레발만 안 쳤어도"
벤처·스타트업 업계는 이대로라면 지주사 CVC 허용으로 기대하는 효과는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지금까지 국내 대기업이 상대적으로 벤처 투자에 관심이 적었던 만큼 전문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외부와의 접점이 필요한데 다 가로막아 버리면 그만큼 대기업이 투자에 나설 유인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도현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장은 "오히려 투명성에도 좋지 않은 방식"이라며 "외부 수혈이 있어야 수익성을 신경쓰도록 강제하는 효과가 있을텐데 계열사끼리 투자금을 모으도록 하면 그만큼 폐쇄적이어서 걱정했던 사익 편취 등의 문제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구글 사례를 드는데 구글은 1년에 1조원씩 투자하고 투자 잔액만 5조~6조원에 이른다"며 "우리나라 VC 총 투자금의 20%에 이르는 수준인데 구글처럼 자금 여유가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국내 기업들은 상황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는 CVC를 막는 금산분리가 없어서 100% 자기자본으로 하지 않는 형태도 많다"며 "구글이 전략상 그러한 구조를 취한 것인데 왜 이럴때만 구글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부, 여당에서 CVC와 관련해 섣불리 ‘공수표’를 남발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투자 활성화라는 지주사 CVC의 취지를 살리면서 이를 허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막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위에서도 지주사 CVC를 통한 기업의 부당 지원행위가 발생할 경우 어떤 기준으로 위법성을 따져야 하는지 모호하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벤처 투자는 불확실성이 많은 투자인 만큼 판단에 주관성이 상당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규율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CVC만 허용되면 마치 일자리가 늘어나고 대기업 투자가 늘어나는 만사형통처럼 말하는데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며 "스타트업 생태계 확장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봐야 하는데 섣불리 추진하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됐다"고 지적했다.

박현익 기자(beepar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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