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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세상읽기] 비정규직과 기본소득 / 조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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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국가부도의 날>은 아이엠에프(IMF) 대란이라 불리던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를 조명한 영화다. 영화는 다양한 인물이 재난과 마주한 순간들을 긴박하게 좇다가 각자의 변화를 짧게 보여주며 끝난다. 외환위기 당시 공장을 운영하던 한갑수는 납품 기업의 도산으로 집까지 팔아야 했다. 10년 후에도 그는 공장에 남았다. 환경은 더 열악해졌고,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을 대체했다. 훌쩍 자란 아들은 기업 면접을 앞두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간곡히 조언을 건넨다. “절대로 손해 보지 마라. 경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비정규직’은 현재 이 경쟁에서 도태된 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사실 1960~80년대 경제개발 시기 인구 대다수는 정식으로 호명되지 않았을 뿐 ‘비정규직’의 삶을 살았다. 특히 무임금 가사노동을 떠맡고, 부업과 아이 돌봄을 병행하던 여성들의 삶은 ‘정규’라 할 만한 게 없었다. 1990년대 통계청 조사에서 임시일용직 비중이 주목을 받더니, 1996년 날치기 통과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파견근로제가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노조를 강타하면서 비정규직은 전 사회적 쟁점으로, 불안정한 삶의 표지로 급부상했다.

돌이켜보건대 노동유연화 정책이 가속화된 2000년대 이후에도 비정규직 논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최선인가? 아이와 노인을 살리는 돌봄 노동, 지구를 살리는 환경운동, 마을을 살리는 공동체 활동은 왜 노동 바깥의 노동에 머물러야 하나?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제임스 퍼거슨이 강조했듯 “보편화된 임금노예의 삶은 필경 마르크스도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10여년 전 좌파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일본 청년들의 운동에 주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알바 노동이 삶의 양식이 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인 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했는데, 유럽에서 이미 공론장을 열어젖힌 기본소득이 이 조건을 마련할 토대로 주목받았다. 2012년 양대 노총과 별개로 치러진 메이데이 ‘총파업’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비정규직, 백수, 실업자, 장애인, 여성운동가, 예술가 등 다양한 인물들이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젠더 수행 파업’ 등 각자의 요구를 담아 행진했다.

뒤이어 기술혁명에 따른 노동의 양적·질적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비정규직 문제의 새로운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움직임은 정치권과 기업에까지 급속히 확장되었다. ‘정규직’이 정상적 규범이 되는 사회는 끝났다, 인간이 원치 않는 노동을 기계에 맡기고 자율적 삶을 살아가도록 사회보장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좌우를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확실히 일과 노동의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상상을 지폈다. 하지만 최근의 인천국제공항 보안업무 정규직화를 둘러싼 공방에서 보듯,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신분이 되었다. 손해 봐선 안 된다는 강박, 삶이 곧 경쟁이라는 비장함을 두른 채 성인이 된 한갑수의 자식들이 ‘비정규직’으로 남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쟁취한 ‘정규직’ 신분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다. ‘도래할’ 기본소득을 두고 그 정당성을 논했던 주장은 여기서 길을 잃고 만다. 코로나라는 돌발 사태로 기본소득은 만인의 언어가 되었지만, 이상적인 기본소득의 요건인 ‘충분성’은 갈 길이 멀다. 끈질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전 국민 30만원 기본소득 시대를 연다 한들 이 전쟁이 끝날까. 재난기본소득이 ‘우리’의 감각을 갖게 했다고 들뜬 사이, 이천 물류센터 화재에서 보듯 어떤 빈자들은 ‘을들’의 전장 바깥에서 고투하다 사라졌다.

“선생님이 부러워요. 정규직이라서.” 대학에 부임한 첫해 한 학생이 건넨 말이다. 그때는 대꾸를 못 했다. 그러다 한동안은 기본소득을 함께 고민하자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그 말도 겸연쩍다. 을들의 싸움과 그 바깥의 주검들을 뒷짐 지고 바라보는, 인권 감수성만큼이나 부동산 감수성이 충만한 엘리트 집단한테 겨누기엔 너무 무딘 칼처럼 보인다. ‘지금 여기’의 기본소득 운동이 정규직 기득권 정치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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