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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편집국에서] 저널소년 노규진 /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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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경태 ㅣ 오피니언 부국장

소년이 왔다.

“저는 아직 신문을 봐요.” 소년의 메일을 읽으며 웃음이 번졌다. 자신이 신문 보는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맞춤법을 정확하게 구사하며 기획거리까지 제안한 편지였다. 맨 끝의 ‘한겨례’만 아니었다면 완벽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수화기 너머 소년의 첫마디에 빵 터졌다. 편하게 말 놓으라고? 초등학교 4학년생의 말법이 아니었다. 이 칼럼에서 종이신문에 관한 글을 두번 쓰며 맺어진 귀여운 독자와의 인연.

“7~8살 때부터 신문을 읽었어요. 처음에는 스포츠면을 보다가 확대됐어요. 하루 30분에서 1시간 정도 봐요. 1면은 무조건 읽죠. 미래&과학, 박노자 칼럼, esc도 좋아요. esc에선 마이클 부스 칼럼 기억나요. 먹는 것에 대한 사소한 정보나 놓치고 있었던 것을 잡아주는데, 대표적으로 레스토랑의 소음 편이 가장 유익했어요.”

초딩이 무슨 신문이냐. 젖먹이 때도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놀던 세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매해 실시하는 언론수용자 조사 대상에 10대와 그 아래는 아예 없다. 그러나 소년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아침에 식구들보다 일찍 일어나요. 신문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정세를 살펴봐요. 그러면 잠이 깨요. 좋은 습관 같아요.”

소년에겐 핸드폰이 없다. 필요할 때 엄마 폰을 사용한다. “유치원 때부터 핸드폰 든 친구들을 봤어요. 초등학교 1~2학년 되면 거의 다 있죠. 엄마가 곧 폴더폰을 사준다고는 하셨어요.” 티브이도 없다. “일주일에 한번 할머니 집에 가서 야구 중계나 <나 혼자 산다>를 보면 돼요. 대신 신문과 책을 읽어요. 랜들 먼로의 책이 특히 재밌는데, 불가능한 일에 대해 최대한 과학적이면서 엉뚱한 방법으로 설명해주거든요.”

학원은 안 다닌다. 소년의 엄마는, 소년이 공부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수학 문제집을 하루 한장 푸는 정도란다. 소년은 엄마의 말을 바로잡았다. “제가 공부에 관심 없다니…. 자화자찬이라 이런 말 하기 뭐한데 모든 과목 시험에서 80점 이하로 내려가본 적이 없어요. 하하하.” 소년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 중이다. 장래 희망이 파일럿이라 항공에도 관심이 많다. 잡지 <월간항공>을 구독한다. 공항이 필요 없는 수직 이착륙, 자율주행 비행기에 관한 기사를 신문에서도 보고 싶어 한다.

노규진. 2010년생. 고양시 백석초등학교 4학년 4반. 아침마다 종이신문에 탐닉하는 이 소년을 ‘저널소년’이라고 이름 붙여본다. 시와 소설에 푹 빠진 문학소년 대신 시사뉴스에 눈을 반짝이는 저널소년. “신문 보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비관할 일 아니에요. 신문 범주가 인터넷으로 넓어진 거잖아요. 물론 저는 핸드폰 생겨도 신문은 계속 종이로 볼 거예요. 종합된 정보를 주잖아요.” 저널소년 노규진은 비현실적 모델이다. 희귀한 특수 독자다.

나는 진지한 자세로 소년에게 묻고 또 물었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소년을 더 존중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 아름 거대한 지면을 펼쳐 사회면 상단 4컷 만화에 키득거리고, 체육면에 실린 고교 야구팀 이름을 손으로 짚어가며 한문을 깨치던 1970년대 중반. 신비로운 보물처럼 가슴에 새겨진 유년의 기억이다. 오글거림을 참으며 물었다. “본인의 인생에서 신문은 어떤 의미일까요?”라고. 소년은 답했다. “신문을 본 게 인생의 바탕이 될 거 같아요.” 나는 끝까지 진지하고 싶어, 웃음을 참았다.

저널소년 노규진 한 사람을 위해 이 칼럼을 썼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종이신문을 고집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소년도 변할 것이다.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는 교양과 지식을 신문에서 쌓으며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서도 아니다. 뉴스를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소화하는 저널소년소녀들이 더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특수한 희망이다. 나는 그저 신문을 좋아하는 이 소년 독자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신문 칼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잊을 수 없는 경험. 소년을 격려하고 싶었다.

“요즘 학교에선 코로나 때문에 쉬는 시간도 없고 운동장에서 뛰어놀지도 못해요. ‘슬기로운 학교생활’ 시리즈를 신문에 실어보면 어때요?” 본인의 바람대로, 신문이 인생의 든든한 바탕이 되면 좋겠다. 종이신문에서 특별한 느낌을 얻으며 주류에 역행해본 소년의 경력이, 이 세상에 풍요로운 느낌표를 퍼뜨리는 씨앗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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