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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평등에 재 뿌리다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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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1776년 7월4일에 발표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다’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마치 백인 남성만 인간인 양 미국은 노예제를 계속 유지했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은 우려와 찬반이 엇갈린 시선 속에서 1863년 1월1일 노예해방 선언문을 발표했다. 1865년엔 헌법으로 노예제 폐지가 명시된다. 이 과정에서 링컨은 감동적인 연설을 한 바 있다. 1862년 12월1일, 링컨은 의회에서 노예해방을 헌법으로 규정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 “역사의 흐름은 피할 수 없습니다. 노예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우리가 지켜온 것과 같은 명예로운 자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마지막이자 가장 좋은 희망을 당당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비열하게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업적으로 링컨은 대단한 인도주의자로 찬양받지만, 역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진심으로 흑인을 백인과 평등한 존재라고 여기진 않았다고 한다. 노예해방 선언은 당시 치열했던 남북전쟁을 끝내고 미국을 하나의 나라로 지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략일 뿐이었다. 실제로 남부를 돕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노예제 폐지라는 명분을 따라 링컨 쪽으로 돌아섰고, 남부에서 20만명에 이르는 흑인들이 북부 쪽 군인으로 합류해 승리를 견인했다.

내겐 이 부분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링컨이 개인적으로 흑인을 어떻게 생각했든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가 ‘자유와 평등이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이 중요함을 호소하는 판단력과 정치적 감각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선언을 실천하고 법 제정까지 망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를 보고 있자면, ‘모두를 위한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소신껏 말하는 이가 이토록 적다는 것에 개탄이 새어나온다.

지난 6월29일, 차별금지법이 7년 만에 아주 어렵게 발의가 되었다. 300명에 이르는 21대 국회의원 중에 법안에 서명한 이는 단 10명이었다. 한 언론사에서 국회의원들에게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206명의 의원이 응답을 거부했다. 기독교의 눈치가 보여서 답변을 못 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한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세상이 망하니 법 제정을 반대하라고 설교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기도를 주관하는 국회조찬기도회엔 무려 60여명의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얼마 전 6월24일에 있었던 일이다. 같은 날 광화문 감리회본부 앞에서 어떤 집회가 있었는지는 이들은 알까.

‘축복은 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집회가 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성적소수자에게 축복식을 했다는 이유로 이동환 목사를 교단 재판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이동환 목사는 2019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하나님은 성적소수자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꽃잎을 뿌렸는데, 이런 행동이 목사 자격을 박탈할 만한 죄라며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감리교단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시며, 몇몇은 제외하신다’고 주장하려는 듯하다. 신께서 노예로 쓰라고 백인에게 흑인을 보내주신 거라고 주장했던 그 옛날 노예제 폐지 반대론자와 다를 바 없다. 차별을 조장하는 종교와 그 종교의 눈치를 보는 정치가 뒤엉켜 있는 꼴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인숙, 이동주, 강민정, 용혜인, 장혜영, 강은미, 류호정, 배진교, 이은주, 심상정, 차별금지 법안에 서명한 이 열 명의 용감한 국회의원들 이름을 기억하자. 교단의 탄압에 온몸으로 맞서는 이동환 목사를 기억하자.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보다 모두를 위한 평등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래서 나도 영험한 주문인 양 이 말을 하고 싶다.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담아, 절실한 진심을 담아서 남긴다. “평등에 꽃잎 뿌리는 자 흥하고, 평등에 재 뿌리는 자 망하리라. 반드시 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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