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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특파원 칼럼] 홍콩의 보라색 깃발 / 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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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인환 ㅣ 베이징 특파원

홍콩 경찰이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사용하는 깃발은 여러 개다. 먼저 주황색 깃발이 있다. 경찰 저지선을 가리키는데, 선을 넘으면 불법이란 뜻이다. 경찰이 파란색 깃발을 들어 올리면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으니 즉각 해산하라”는 뜻이다. 노란색 깃발은 “불법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경고다.

빨간색 깃발도 있다. “더 이상 접근하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찰이 검은색 깃발을 들어 올리면, 곧바로 최루탄이 발사된다. 색깔별로 마련한 깃발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영어와 중국어로 적혀 있다. 집회·시위에 나선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까?

‘홍콩판 국가보안법’(홍콩 보안법)이 발효된 뒤 첫 시위가 열린 1일 홍콩 경찰이 새로운 깃발을 들고나왔다. 얄궂게도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이다. 깃발엔 빼곡하게 이렇게 적혀 있다.

“경찰이 경고한다. 당신들은 지금 분리독립 또는 체제전복 등과 같은 의도가 있는 깃발이나 손팻말을 들고 있거나, 구호를 외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이는 홍콩 보안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으며, 체포되거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깃발에도, 손팻말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구호 역시 마찬가지다. 깃발과 손팻말과 구호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도구다. 보라색 깃발이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의도’다. 홍콩 보안법은 ‘의도’를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홍콩 경찰은 이날 낮 한 남성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음으로 체포했다. 홍콩 경찰이 공개한 체포 당시 사진을 보면, 이 남성은 홍콩섬 중심가 코즈웨이베이 지역의 거리에서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홍콩 독립’이라 쓴 깃발을 길바닥에 펼쳐 놓은 채 팔짱을 끼고 있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색 셔츠에는 ‘홍콩해방, 시대혁명’ 등의 글귀가 적혀 있다. 깃발과 셔츠가 체포 사유란 얘기다.

모두 6개 장 66개 조로 구성된 홍콩 보안법은 제3장(20~39조)에서 △분리독립 △체제전복 △테러행위 △외세결탁 등을 ‘4대 범죄’로 규정했다. “폭력 또는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20조·분리독립), “폭력,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 또는 기타 불법 수단”(22조·체제전복), “실행하거나 실행하겠다는 위협”(24조·테러행위),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식”(29조·외세결탁) 등이 범죄 행위의 방식으로 언급됐다. 깃발과 손팻말과 구호와 셔츠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근거다.

“홍콩 보안법을 철회하도록 미국 정부가 중국 정부를 더욱 압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들고나왔다. 내가 이 깃발을 들고 있다고 해서 미국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안전하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1일 오후 시위에 미국 국기를 들고나온 홍콩 시민 리힝닌(52)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리힝닌이 틀렸다. 그는 ‘안전’하지 못하다. 미국 국기를 들고나온 그의 ‘의도’가 문제다. 홍콩 보안법 29조 4항이 규정한 “홍콩이나 중국 정부에 제재를 가하거나, 봉쇄 또는 기타 적대적 행위를 하도록 요청”하는 행위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깃발과 손팻말과 구호와 셔츠를 조심해야 한다. 홍콩 보안법 4조에는 천연스레 이렇게 적혀 있다.

“홍콩특별자치구에서 국가안보를 수호함에 있어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포함해 홍콩 기본법과 홍콩에서 적용되는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에 따라 부여된 자유와 권리는 법에 따라 보호돼야 한다.”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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