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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설왕설래]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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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밥은 먹고 다니냐.” 경기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로 분한 배우 송강호가 터널 속에서 용의자를 놓아주며 던진 말이다. 형사는 유일한 증거물의 유전자(DNA) 감식 결과가 용의자와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자 좌절하고 만다. 송강호는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밥이 넘어가느냐’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영화는 범인 검거에 실패한 채 막을 내린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상이 34년 만에 규명됐다. 영화와 달리 경찰은 지난해 9월 피해자 유류품의 DNA 검사 결과에 따라 처제 성폭행·살해혐의로 부산교도소에서 26년째 복역 중인 이춘재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14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살인 말고도 34건의 성폭행·강도질을 저질렀다고 털어놨고 이 중 9건이 입증됐다. 뚜렷한 동기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무료한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범행에 나섰다니 기가 찬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은 할 수 없지만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교훈을 남긴 것은 다행스럽다.

희대의 미제 사건이 해결됐다지만 경찰의 부실 수사와 공권력 남용이 할퀴고 간 상처는 크고 깊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당시 이춘재를 세 차례나 수사하고도 용의선상에서 배제하는 우를 범했다. 대신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담당 경찰관들이 사체를 은닉하고 증거도 인멸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게 끝이 아니다. 허위 자백과 진술을 강요하는 조사를 견디다 못해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가 하면 옥상에서 뛰어내린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아버지 무덤 근처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고, 다른 이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은 어제 “무리한 수사로 피해를 본 모든 분께 사죄드린다”고 했다. 말로 어물쩍 넘길 일이 아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유린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고 무고한 시민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땅에 떨어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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