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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세상읽기]미국의 인질,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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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9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나경원은 “문재인 대통령은 모욕과 경멸을 해오는 북한에 대해 안보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져 한·미·일 삼각 공조 붕괴 위기마저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스톡홀름증후군은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 현상을 말합니다. 구출된 인질범들이 범인에 대해 공포, 분노 대신 동일시하고 애착을 보였죠. 작은 배려에 감동하고 감사했습니다. 반대로 범인은 인질을 경멸했습니다. 체포 후 왜 내가 하라는 대로 했냐. 왜 아무도 덤비지 않았냐며 인질을 비난했죠. 나경원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 인질이면서 북한 편든다는 비유를 한 셈입니다. 비슷한 비난이 최근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맞는 비판일까요.

경향신문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지금 미국에서 존 볼턴 전 국가안보 보좌관의 회고록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볼턴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수많은 뉴스매체에서 서평을 냈습니다. 논란도 많지만, 트럼프 정부의 혼란과 실패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죠. 책은 북·미관계의 난맥상도 잘 조명했습니다. 트럼프의 대북 접근에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미 주류에 이는 애초에 어불성설이었으니, 그중 한 명인 볼턴으로서는 당연했죠.

볼턴은 애초에 북한을 살인 정권으로 여겨 협상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김영철의 백악관 방문, 싱가포르·판문점·하노이 정상회담 등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무산시키려 노력했죠. 통일을 추구하는 한국과 비핵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국익이 다르다는 지적도 솔직하고 분명하게 합니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던 그에 대한 의심, ‘초강경 매파’로 북·미 협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책은 충분히 입증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책의 반만 읽는 셈입니다. 책을 보면 ‘초강경 매파’나 ‘비둘기파’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켈리 당시 비서실장,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볼턴과 생각을 공유한 모습이 여럿 나옵니다. ‘매파’ ‘비둘기파’ 구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죠. 한국은 볼턴을 ‘초강경 매파’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는 조금 튀는 주류였던 겁니다.

북핵 사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애착을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일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북한도 한국을 인질로 삼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반도전쟁은 공멸임을 알 테고, 남한 위협은 재래식 무기로도 충분하니까요. 북한 핵무기는 미국을 향한 시위용품입니다. 한국이 인질이라면 미국의 인질일 가능성이 큽니다. 미군은 북핵을 막아야 하는 없던 숙제가 생겼고 한국은 그 최전선에서 긴장과 위험을 감수하는 입장이 됐습니다. 북한과의 대결 사이에 여차하면 희생당할, 잘려 나갈 꼬리의 처지, 딱 인질이죠.

그래도 한국은 꾸역꾸역 견뎌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예가 없는 과도한 미군 주둔비 부담, 연평균 7000억원대의 미국 무기 구매, 미군 부대의 환경오염, 지속하는 미군 범죄, 이들에 대한 법적 처리 포기 등 그 목록은 길고 오래됐습니다. 또 미국에 대해 끊임없고 변함없는 동조와 감화를 이어갑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발 긴장에도 이도훈 본부장은 워싱턴으로 날아갔습니다. 미국 전략자산이 들어올 때마다 걱정은커녕 감동과 감사에 휩싸이죠. 미군이 철수는 하는지, 언제, 어떤 조건에 하는지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의문을 제기하면 빨갱이라는 고함에 휘둘립니다. 시위장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트럼프 초상화가 서울역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볼턴이 알려주듯 미국은 한국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트럼프는 전략적 고려도 없고, 그 보좌관들은 미국 국익만 좇습니다. 한국의 통일정책은 걸림돌일 뿐이죠. 그러니 문재인 정부는 이 병을 다스리는 슬기로운 의사가 돼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비건 대표보다 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이가 방한을 해도 슬기롭지 않은 인질 생활은 계속될 테니까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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