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4 (금)

“누군가 날 죽이려 하는데, 그게 내 남편 같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여주인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자는 왜 글을 쓸 수 없는가’

에스에프 작가이자 비평가 퀴어활동가였던 조애나 러스 비평집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조애나 러스 지음, 나현영 옮김/포도밭출판사·2만원

한겨레

조애나 러스(1937~2011).


소설을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 에스에프(SF)는 문학이지만, 보통의 문학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에스에프 소설이 최근 대중의 관심을, 미디어의 관심을 얻으면서 생기는 문제는 에스에프 소설에는 적용되지 않는 비평적 도구라는 난처함에서 비롯할 때가 많다. 에스에프 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애나 러스는 비평집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에서 ‘에스에프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에스에프 장르가 이야기로서 갖는 매혹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특히 여성 저자들에게 왜 이 장르가 더 멋진 도구인지 해석한 책이다.

한겨레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의 정의를 빌려 조애나 러스는 에스에프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글이라고 정리한다. 에스에프의 주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에스에프는 교리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종교, 즉 종교가 기원한 정서와 경험의 근거를 직접 다루는 유일한 현대 문학이다. 그와 동시에 노동을 핵심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사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에스에프는 실재에 대한 창의적인 과학 지식과 과학적 방법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한다. “과학과 SF의 관계는 (유추적으로) 중세 기독교와 의도적으로 교훈을 주려고 쓴 중세 문학의 관계와 같다.” 교훈이라는 것은 소설이 기반하는 과학적 개념을 신나게 설명한 뒤 그 결과 때로 종교적 분위기에 가까운 경외와 숭배가 담긴 “경이의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는 데서 가져온 말이다. 이렇게 에스에프 특유의 현상과 경험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익숙한 기준과 방법으로 다가가면? 에스에프는 죄다 문학이 아니라고 일축하거나, 협소한 종류의 특정 에스에프만을 선호하거나, 이해하고자 하는 텍스트 자체를 오해하거나 오인하는 결과만이 남는다.

에스에프가 소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1960년대에 글을 쓰기 시작해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의 태동 이후인 1970년대에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조애나 러스는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의 2부에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모았다. ‘여주인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여자는 왜 글을 쓸 수 없는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단일한 관점에서 문화를 상상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남성의 관점이다. 여자는 남자와 얽힌 맥락에서 이야기에 등장하고, 여자가 아닌 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미지(조신한 처녀, 사악한 요부, 예쁘장한 여선생, 아리따운 잡년, 정숙한 아내)로 전시된다. 조애나 러스는 기존의 젠더 역할에 매이지 않는 장르소설을 중심으로 여성 작가, 그리고 여주인공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8장인 ‘누군가 날 죽이려 하는데 그게 아무래도 내 남편인 것 같아: 모던 고딕’은 2010년대를 휩쓴 <나를 찾아줘> <걸 온 트레인> 같은 가정스릴러(“내가 누군가를 죽였는데 그게 아무래도 내 남편인 것 같아”)와 연결해 생각하면 특히 흥미롭다. 조애나 러스는 모던 고딕이 여성이 처한 전통적 상황(적어도 중산층 여성이 처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지적한다. 더 정확히는 “이 소설들은 여성성의 신화를 넘어서거나 여성성의 신화라는 측면에서 부도덕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일 없이, 정확히 여성성의 신화를 신봉하는 중산층들이 필요로 하는 탈출구로서의 독서가 되어 준다.”

한겨레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 아일랜드 화가 리처드 로스웰이 1840년에 그린 것으로, 43살 때의 모습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9장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에 따르면, 최초의 에스에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는 판타지를 이용해 68혁명기 구호 중 하나였던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는 구호를 현실로 바꾼 인물이다. 1818년 <프랑켄슈타인>의 초판 서문에서 셸리는 에스에프를 훌륭하게 정의한다. “상상력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여 기존 사건들의 통상적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인간의 감정보다 더 포괄적이고 압도적인 감정을 만들어 낸다.”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행복한 환경에 있었다면 메리 셸리가 무엇을 썼을지. 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자식과 남편의 죽음을 겪지 않았다면? 이 가정법은 많은 이전의 여성들의 삶을 볼 때 던지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여성의 생명을, 여성의 재능을 우리는 잃었을까. 지금은 어떨까. 현실에도, 문학에도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