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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새아기는 살아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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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대신 붓을 든 풍양 조씨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여자

한겨레

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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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끝자락, 서울 김씨 댁 새아기 조씨(1772~1815)는 살아남기로 마음을 정한다. 서로 사랑하던 동갑내기 남편이 혼인한 지 5년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것이다. 양반가의 법도로 보나 지우(知友)로서 서로 위해 주던 관계로 보나 따라 죽는 것이 도리이고 의리이다. 이른바 열녀라는 것이다. “죽어 모르는 것이 즐겁고 차마 당하지 못한 지경을 견디며 사는 것이 더 혹독하니 저를 위하신다면 살라는 말을 마오.” 딴 마음 품지 말라는 언니에게 조씨가 한 말이다. 남편이 생사를 오갈 때 생혈로 살려보고자 단지(斷指)를 하려다가 자결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그때 칼을 뺏던 아버지의 무너져 내리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내 생목숨 끊어 여러 곳에 불효를 하는 참담한 정경을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 없었다.” 풍양 조씨의 <자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편을 떠나 보낸 지 1년, 조씨는 지난 20년의 삶을 써내려 갔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이 책 <자기록>이 2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십수년 전이었다. 새아기는 살기 위해 붓을 들었다. “오호라 사람의 아내 되어 음식의 짜고 싱거움을 맞추고 베고 삶기를 직접 하는 소임은 못해보고, 제기(祭器)를 다루며 제사에 정을 표하는 도리를 펼 뿐이니 유유한 설움과 이 느꺼운 한을 어찌하리오.” 가을의 과거장에서 향시를 보다가 병을 얻은 남편이 시름시름 3년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그 참혹한 과정과 생전의 정겨운 기억을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애는 구천에 끊어지고 넋은 황천에 사라지니 차마 어찌 견디리오.”

조씨의 기록은 조선사회의 가족정서를 다시 써야 할 만큼 놀라운 정보들을 담고 있다. 남편은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아내 조씨는 주로 친정에서 지내는데, 시집은 일이 있을 때 다니러 가는 곳이었다. 조씨 자매가 친정의 자기 방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나 더할 나위 없는 아버지의 딸과 사위 사랑도 듣던 이야기와 다르다. 서울의 좀 사는 양반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녀는 살아남기로 했다. 조씨는 “살 생각을 하라고 재삼 당부하며 목을 놓아 흐느끼시는” 아버지, “애타게 내가 살기를 마음 졸이시는” 아버지, “내가 만일 죽으면 그 슬프고 끔찍한 설움에 눈이 멀 것 같은” 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청풍 김씨 3대 독자인 남편을 사랑으로 애지중지 길러주신 시집 어른들은 어찌할 것인가. 딸도 없이 오직 아들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건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 참혹한 상심을 누가 돌볼 것인가. “남편은 시부모의 기둥인데 기둥이 부러지니 어디에 의탁하며, 남편은 시댁의 주춧돌인데 주춧돌이 꺾어지니 어찌 엎어지지 않으리오.” 나를 지극히 사랑한 그들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또한 새아기 조씨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

<자기록>은 고난을 넘어서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죽음을 통한 삶의 기록이다. 유려한 문장과 세밀한 주석으로 무명의 한 여성 조씨의 음성을 곡진하게 살려낸 번역자 김경미 선생은 <자기록>을 “죽음에 대한 지극한 슬픔을 표현한 애도 문학으로서 격조를 보인 작품”으로 평가한다. 무엇보다 조씨의 의미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도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성찰적 인간의 모습이다. 남성 지식인들의 붓 끝에서 나온, 우리가 아는 열녀는 ‘한치의 주저함 없이 의(義)을 향해 돌진하여 장렬하게 죽은’ 굳센 의지의 소유자다. 새아기는 그런 이념의 희생자가 되기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록>은 나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가족을 통한 나에 대한 기록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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