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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텔레비전을 보다가[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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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요새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텔레비전을 평소보다 더 많이 봤다.

<나 혼자 산다>에는 유아인의 크고 멋진 저택이 나왔는데 그 집의 모든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려는 <구해줘! 홈즈>적인 연출이 재미있었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봤다. ‘아픈 과거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동화작가.’ 이런 설정을 가진 여자 주인공을 한국 드라마에서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고리타분한 성별 문법이 뒤바뀐 극을 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주말엔 <1호가 될 순 없어>를 몰아 봤다. ‘왜 이혼한 코미디언 부부는 없을까?’라는 프로그램의 발상은 결국 코미디언 부부 중 첫 번째 이혼 사례를 끌어내는 전개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나쁜 기대를 품었지만 잘 모르겠다. 전부 갈라설 의지가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던데.

경향신문

박나래, 김숙, 송은이, 이성미(왼쪽부터)는 KBS <다큐인사이트> ‘개그우먼’에 출연해 그동안 한국 코미디에서 다뤄진 여성 희극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튼 예능> 저자인 자유기고가 복길은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코미디언 여섯명이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자책과 반성, 다짐을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고 말한다.사진| KBS·JTBC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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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인사이트>의 ‘개그우먼’도 봤다. 경력 40년의 코미디언 이성미, 1990년대에 데뷔한 송은이와 김숙, 2000년대 <개그콘서트>의 황금기 멤버였던 김지민과 오나미, 그리고 2019년 연예대상 수상자 박나래까지 방송은 총 여섯명의 여성 희극인을 중심으로 한국 코미디가 여성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차분하게 짚어냈다.

여성이란 그저 콩트 속 도구로만 사용되던 시대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자신의 외모와 신체적 특질을 비하하며 웃음을 만들고, 남성 중심 예능 판도에 끼지 못하고 점차 입지를 잃었던 과거가 남성 코미디언들의 영광스러운 시간과 나란히 놓이며 뼈아프게 그려졌다. 나는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코미디언 여섯명이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자책과 반성, 다짐을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다큐멘터리였지만 최근에 내가 본 것 중 가장 재미있는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지난주에는 <개그콘서트> 마지막 회도 봤다. ‘시청률의 제왕’이라는 코너에서 박성광은 ‘새끼’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는 것에 화를 내며 “뭐 이렇게 안 된다는 게 많아! 손발 다 묶어놓고 어떻게 웃기라는 거야!”라며 역정을 냈다. <개그콘서트>의 부진과 종영에는 강도 높은 제약의 영향이 큰 것이라 에둘러 말한 것이다. 나는 그 무딘 풍자가 담고 있는 억울함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에는 허용되었던 ‘김치를 먹는 데 성공해서 김치녀가 되겠다’ 같은 대사도, 외모에 대한 비하도, 특정 인종을 흉내내는 개그와 분장도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유튜브와 경쟁하라는 거냐며 외치던 볼멘소리를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코미디언보다 웃기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선 오랫동안 사랑받던 정치 코미디들이 제작에 어려움을 호소하거나(<Veep>), 풍자를 포기하고 코미디란 대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스페이스 포스>). 코미디는 현실에 강한 영향을 받고, 따라서 사회의 불안이 높을수록 어렵다. 터부를 건들고, 상식을 뒤틀며 위악을 부리는 웃음은 쉽다. 하지만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합의가 없고, 차별로 인해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그런 코미디는 그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때 발생하는 원초적인 웃음만 남길 뿐, 지속적인 동력을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다루기 민감한 주제에서는 한발 물러난 뒤, 사회가 아닌 개인을 향한 잘못된 방향의 풍자, 인신공격과 자기비하적인 코미디가 외면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을 다시 본다. 코미디가 갖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기능을 사용하고, 그 힘을 확인하며 다시 부상한 사람들은 좀 더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방송의 마지막, 송은이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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