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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아무튼, 주말] ㅎㅎㅎㅎㅎ… 초성체의 기원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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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로 자리잡은 초성체

조선일보

평창 동계올림픽 엠블럼은 평창의 초성을 모티브로 디자인됐다. 오른쪽은 CU가 2018년 출시한 ‘ㅇㄱㄹㅇ ㅂㅂㅂㄱ(이거레알 반박불가)’ 쇼콜라 생크림 케이크. /위키피디아·BGF리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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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후? 듬흑? 이게 뭐야!" 지난달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정부 유튜브 채널의 새 로고를 본 네티즌 반응이다. '대한민국'의 초성인 ㄷㅎ, ㅁㄱ을 두 글자씩 가로로 배치한 로고인데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광고 전문가 출신 손혜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조차 유튜브 채널을 통해 "국가 상징인데 가로로 '대한민국'을 넣으면 안 되느냐"고 비판할 정도였다. 초성체(단어의 초성만 따서 표기하는 것)가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의도와 달리 비난 대상이 됐지만, 초성체는 이미 우리 삶과 떼놓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ㅋㅋ' 'ㅇㅇ' 같은 클래식부터, 'ㅇㅈ(인정)' 같은 신조어까지. 초성체의 출발은 어디고,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1963년 소설에 등장한 'ㅎㅎ'

문헌상 처음으로 초성체가 등장하는 것은 무려 57년 전인 1963년이다. 주인공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행'으로 당선된 소설가 전상국. 1963년 1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동행'의 마지막 부분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ㅎ ㅎ ㅎ ㅎ ㅎ ㅎ ㅎ….' 전상국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 'ㅎㅎ'을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전상국 이후 30여 년간 자취를 찾기 어려웠던 초성체는 1990년대 중반 PC통신에서 부활한다. '하이루'를 줄인 말인 'ㅎㅇ'이 신호탄이었다.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는 "PC통신 시절 동호회 안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안부를 물으며 초성을 썼다. 편리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예의 없다는 인식이 커서 정말 친한 친구끼리만 사용하던 정도"라고 술회했다. 초성체는 점차 인터넷 문화 전반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 손으로 키보드를 조작해야 하는 게임에서는 공격 신호를 'ㄱㄱ(고고)', 웃음을 'ㅋㅋ(크크)'로 줄여 표현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욕설과 비속어 제재를 피하기 위해 초성체로 욕을 날렸다.

초성체의 전성기는 스마트폰이 보급된 2010년 무렵 찾아왔다. 모든 의사소통이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인터넷 소통에 기반을 둔 초성체도 일상 대화의 일부가 됐다. '개이득(ㄱㅇㄷ)' '이거 레알?(ㅇㄱㄹㅇ)' 등 신조어가 이때 나왔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채팅 기반의 비대면 소통이 주류가 된 2010년대 이후에는 소통의 편의성뿐만 아니라 재미를 위해 초성체를 쓰는 이가 늘었다. 아무런 규칙이나 합의 없이 만들어낸 초성으로 퀴즈를 내는 '초성 퀴즈'도 함께 유행했다"고 평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엠블럼도 초성체

광고·마케팅 영역에도 초성체가 침투했다. 2016년 신세계는 온라인 쇼핑몰 SSG의 초성(ㅅㅅㄱ)을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해 '쓱'이라 이름 붙인 광고를 냈다. 처음 '쓱' 광고가 방영된 해 매출은 전년 대비 32% 늘었다. CU는 2018년 'ㅇㅈ? ㅇ ㅇㅈ(인정? 어 인정)' 등 초성체를 이름으로 쓴 디저트 케이크를 출시하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유명한 초성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엠블럼이다. 평창의 초성인 'ㅍㅊ'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이 엠블럼은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해외 커뮤니티에선 "한국 알파벳으로 스포츠와 계절을 표현한 게 독특하다"는 호평이 나왔다. 당시 엠블럼 개발에 참여했던 제일기획 관계자는 "한글을 세계에 알릴 기회로 올림픽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디자인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면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초성만 적는 것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낼 수 있다"고 했다.

초성체는 사회운동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2018년 미투 운동에서 문화 예술계의 내부 고발자들은 성폭력 가해자의 이름을 초성으로 폭로했다. 배우 겸 청주대 교수인 조민기는 'ㅈㅁㄱ'으로, 연극 연출가 오태석은 'ㅇㅌㅅ'으로 알려졌다. 네티즌들은 가해자의 초성을 바탕으로 이들의 신원을 추적했고, 곧 본명이 드러난 가해자들은 강단에서 퇴출당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초성 폭로는 '김모씨' 'A씨'보다 가해자의 신원을 더 적극적으로 밝히면서도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피해자들로서는 초성 폭로가 명예훼손 등 법적 시비에 걸리지 않으면서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우회로라 봤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사회 곳곳에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은 초성체, 문제는 없을까.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국어의 생산적 활용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무분별한 초성체 남발이 국어 규범을 파괴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초성체가 일반화돼서 의사소통에 문제를 겪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오히려 대화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해주니, 언중이 선택한 새로운 흐름이라 봐야죠."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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