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소개팅에 레깅스 입고 가도 되나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2020 대한민국 레깅스의 나라

일요일인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인왕산 등산로 입구. 20대 여성 3명이 레깅스를 입고 산에 오르는 중이었다. 이날 산에 오른 젊은 층 대다수가 비슷한 차림이었다. 하의를 덮는 긴 반소매 티나 짧은 상의에 레깅스를 입었다. 남성의 경우 레깅스에 반바지를 겹쳐 입기도 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서울 용산구 이촌동 인근 한강공원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색색의 레깅스를 입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이제 서울 도심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레깅스 입은 사람 한두 명쯤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즘처럼 레깅스가 대접받는 시절이 있었을까. 물론 레깅스는 전부터 쫄쫄이, 요가복 등 여러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요가학원과 헬스장을 넘어 조깅·등산, 식당·커피숍 등 일상생활 공간으로까지 파고든다. 직장인 대상 커뮤니티, 패션 커뮤니티 단골 소재도 레깅스. '회사에 레깅스 입고 출근하는 직원 괜찮나요'와 같은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2018년 10월 우리보다 몇 년 앞서 미국에서 레깅스가 유행했을 때, 블룸버그통신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썼다. '미국은 어떻게 요가 바지의 나라가 됐나.' 2020년 7월, 대한민국도 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레깅스의 '일상 침투'.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레깅스의 나라가 됐나

레깅스(leggings)는 발부분이 없는 타이츠 모양 하의다. 가볍고 신축성이 뛰어난 원단으로 만들어진다. 20세기 미국 패션을 연구하는 네바다대학교 데어드레 클레멘테 교수는 "레깅스는 무용 패션에서 착안한 것"이라며 "발레리나 혹은 발레리노의 복장을 떠올리면 쉽다"고 했다. 이후 1980년대 합성 섬유 기술 발달과 에어로빅 열풍이 맞물리면서, 레깅스는 에어로빅 복장으로 사랑받았다. 2000년대 초 요가가 유행하면서 레깅스는 다시 '요가복'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무렵 등장한 '요가복의 샤넬' 룰루레몬은 일상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는 요가복을 만들었다. 바짓가랑이 부분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천을 덧대 여성의 몸매를 덜 부각시키고, 탄성은 더욱 좋게 만든 것. 이때부터 여성들이 요가를 마친 후에도 일상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요가복을 입은 채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뉴욕 상류층의 삶을 기록한 책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는 "2000년대 중반 룰루레몬은 뉴욕 상류층 여성들의 공식 운동 의상이자, 어린이집 등·하원 유니폼이었다"며 "처음엔 충격적인 노출증으로 보였지만 금세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 됐다"고 썼다.

성신여대 이향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해외에서 레깅스 패션은 이를 소화하는 사람이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필라테스나 요가를 하고, 운동복으로 룰루레몬을 사 입을 정도의 생활수준이라는 걸 단번에 보여주는 수단 중의 하나였다"며 "이 문화가 할리우드 스타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져 나갔다"고 했다.

한국에선 2013년 연예인 클라라가 짧은 상의에 레깅스만 입고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한 장면을 기억하는 대중이 많다. 당시엔 '19금 시구' '적절치 않은 복장' 등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지만, 레깅스만 단독으로 입을 수 있다는 실천 사례로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다. 이 교수는 "패션은 남에게 잘 보이고, 매력을 어필하는 중요한 도구"라며 "내가 패셔너블하다는 걸 강조하는 수단 중 하나에 '건강함'이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실제 클라라 이후 많은 연예인이 레깅스를 입고 시구하거나, 공항 출국장 등에 레깅스를 입고 나왔고, 일반인 중에서도 이를 따라 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2015년 요가 강사였던 신애련(28) 대표가 창업한 '안다르'는 이런 분위기를 정확하게 읽었다. 안다르는 일상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는 레깅스를 강조하며, 신 대표가 레깅스만 입고 출근하는 모습 등을 광고로 내보냈다. 가격은 룰루레몬의 4분의 1 수준. 안다르는 설립 첫해 매출 9억원을 기록하고, 지난해 연 매출 800억원을 돌파했다. 최근에는 레깅스를 입는 남성도 늘어나는 추세. 룰루레몬은 2023년 말까지 남성복 진용을 2배 확장하겠다고 밝혔으며, 안다르는 올해 처음 남성용 레깅스 판매를 시작했다.

조선일보

안다르 신애련 대표가 레깅스를 입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 안다르는 일상에서도 레깅스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광고를 제작했다./안다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레깅스 입고 갈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

그렇다면 레깅스의 침투를 허용할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일까. '아무튼, 주말'이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20~50대 남녀 4011명에게 '레깅스를 입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물었다. 가장 많은 응답자(50.6%·복수응답 가능)가 '야외 운동(조깅·등산)'을 꼽았다. 그다음이 '헬스장'(42.9%)이었다.

서울 중랑구에 사는 이정민(28)씨는 "요즘엔 헬스 할 때 개인 트레이너 선생님이 '꼭 레깅스를 입으라'고 한다"며 "근육 운동 등을 할 때 내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몸매 변화도 잘 드러나서 좋다"고 했다.

응답자 10명 중 3명(33.9%) 이상은 영화관, 커피숍 등 일상생활 공간에서도 레깅스를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중구에 사는 박선애(26)씨는 "신축성이 좋고 가볍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 움직일 때는 레깅스를 주로 입는다"고 했으며,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윤모(32)씨는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주로 레깅스를 입는다"고 했다. 실제로 레깅스를 입는 이유를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답은 '편하다'(47.2%)는 것. 그다음이 '운동에 도움이 돼서'(26.5%), '레깅스 패션이 예쁘고 멋있어서'(11.5%), '몸매에 자신이 있어서'(9.8%) 순이었다. 직장인 한성은(26)씨는 "레깅스는 다리 라인을 잡아줘서 다리가 얇고 길어 보이며, 몸매가 예뻐 보인다"며 "그로 인해 자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어 짧은 상의와 함께 레깅스를 입는다"고 했다.

그러나 레깅스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직장(8.3%)이나 소개팅(3.2%)에서 레깅스를 입을 수 있다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남자 직장인 이모(33)씨는 "운동을 할 때는 상관없지만, 일상생활이나 직장에서 몸매가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는 건 남녀 상관없이 민폐라고 생각한다"며 "아무리 패션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상대를 민망하게 하는 건 이기적인 일"이라고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남성 김모(38)씨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무슨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TPO 따져야

전문가들은 보통 시간(time)·장소(place)·상황(occasion)에 맞게 입을 때, 이를 좋은 의복이라고 본다. 인덕대 시각디자인학과 홍지원 교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옷을 입으라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좋은 패션은 트렌드를 따르더라도, 남의 시선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홍 교수는 "나도 학교에서 장시간 작업할 때 레깅스가 편해서 찾게 된다"며 "짧은 상의와 레깅스를 입을 때는 긴 재킷을 걸친다든가, 원피스 아래에 레깅스를 신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TPO에 맞게 레깅스를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향은 교수도 "결국 남에게 혐오감을 주느냐 안 주느냐가 핵심인데, 문제는 같은 패션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끼는 부류와 안 느끼는 부류가 나뉜다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레깅스를 입은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에 '민망하다'(34.9%·복수응답 가능)는 답이 가장 많았지만, '멋있고 예쁘다'(26.5%),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25.7%)는 답도 적지 않았다. 세대별 차이도 컸다. 20대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38.4%)는 반응이 가장 많았지만, 30대는 '민망하다'(33.3%)가 가장 많았으며, 이는 40대(39.2%), 50대(41.2%)로 갈수록 더 높아졌다.

이 교수는 "유행이라는 건 흡수가 되고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맨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며 "나는 괜찮지만 아직 대다수가 불편하다면 이를 배려하는 것이 사회적인 매너로 받아들여진다"고 했다.

물론 TPO도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50년 전엔 미니스커트도 풍기문란의 이유로 처벌 대상이었다.

조선일보

안다르가 지난 5월 출시한 남성 전용 레깅스. 레깅스 앞부분에 입체 패턴을 적용해 착용했을 때 민망함을 줄였다. /안다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광화문 헬스장에서 레깅스만 입은 남자를 만났다
남자도 레깅스 시대 편하고 근육 잘 드러나


레깅스가 영역을 넓혀가는 건, 장소만이 아니다. 성차(性差)도 없애고 있다. 서울 광화문 인근 헬스장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41)씨는 “헬스장에 갈 때마다 긴 상의나 반바지 없이, 레깅스만 입고 운동하는 남자 2명씩은 본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 몸 좋은 사람들이 입는 경우가 많아서 자랑한다는 느낌이 든다”며 “약간은 부럽기도 하고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이제 레깅스는 더 이상 여자만 입는 옷이 아니다. 남성(male)과 레깅스를 합쳐 ‘메깅스’란 말이 나올 정도로, 레깅스 입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왜 입을까. 지난 4월 한 헬스 유튜버는 ‘남자가 레깅스 입는 이유’를 신축성이 좋아 자유롭게 여러 동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짧은 후드 티에 레깅스만 입고 헬스장에 나와 스쿼트부터 다리 스트레칭 등의 동작을 자유자재로 소화했다.
레깅스를 입으면 다리 근육 등이 잘 드러난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다. 이 유튜버는 “레깅스에 반바지를 입으면 운동하는 사람의 느낌이 없다”며 “운동하는 사람 티를 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레깅스를 입은 남성은 레깅스를 입은 여성보다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레깅스 입었을 때 불편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2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그렇다’고 답한 남자가 여자보다 많았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심해졌고, 레깅스를 입어 본 50대 남성의 경우 75.6%가 ‘레깅스를 입었을 때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고 답했다. 50대 여성(57.7%)에 비해, 17.9%포인트 더 많았다.

평소 레깅스를 자주 입는다는 여성 직장인 이모(25)씨는 “여성 레깅스는 몸매를 보완해주는 제품들이 많지만, 남성은 신체 구조상 민망할 것 같다”고 했다. 직장인 조모(26)씨는 “남자도 레깅스를 많이 입어서, 레깅스를 성적인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성 레깅스 업체들은 실제 레깅스를 입었을 때 민망함을 최대한 피할 방안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5월 남성 레깅스를 출시한 안다르는 레깅스 앞부분에 입체 패턴을 적용해 민망함을 최소화했으며, 함께 입을 반바지도 내놨다.

[남정미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