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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개인 공간의 탄생… 18세기 욕망·사생활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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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말까지 아무도 혼자 안지내 / 침실 등 삶의 공간 근대 이후 산물 / 사생활 보장한 안락한 공간으로 / 개인취향 새로운 가구·물건 인기 / 당시 방에 얽힌 이야기·역사 탐구

세계일보

프랑수아 부셰의 ‘화장방’. 1742년 作. 당시 화장방을 즐겨 그렸던 프랑수아 부셰의 작품으로 동양적인 화려한 병풍이 눈길을 끈다. 병풍이나 스크린은 화장대와 더불어 귀부인의 화장방의 대표적인 가구였다. 문학동네 제공


사람은 일생을 방과 함께한다. 방은 우리 존재의 기본 배경이자 무대다. 누구나 방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결국 방에서 죽는다. 혼자만의 오롯한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주는 방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방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침실, 서재, 응접실, 부엌 등 우리에게 친숙한 삶의 공간은 사실 근대 이후의 산물이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17세기 말까지 아무도 혼자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침실도, 심지어 침대도 모두 공용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8세기 들어서부터 사회 지위와 권위를 전시하는 무대로 기능하던 집이 기술 발전으로 사생활을 보장하는 안락한 공간인 방으로 재정의됐다는 것이다.

‘18세기의 방’은 한국18세기학회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 27명이 ‘방’을 키워드로 18세기 방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를 탐구한 책이다. 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18세기 동서양에 나타난 주택구조, 인테리어 등의 변화를 추적하고 사생활을 구성하는 방의 의미를 풀어냈다. ‘18세기의 맛’, ‘18세기 도시’에 이은 이 학회의 세 번째 책으로, 포털에 연재됐던 내용을 재정리해 출간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서양에서 집이 사생활을 보장하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18세기에 들어서 개인 공간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종류의 방이 배치됐다. 이에 따라 개인의 취향을 살린 새로운 가구와 물건이 인기를 끌게 됐다. 당시 귀부인의 침실 옆에는 개인용 ‘클로젯’이 만들어졌다. 독서와 사색을 오롯이 즐기는 자기만의 서재가 만들어졌고, 여성들이 주로 쓴 글쓰기 책상도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오만과 편견’을 남긴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이때 응접실 창가 작은 탁자 위에 아버지가 선물한 ‘글쓰기 상자(writing box)’를 올려놓고 글을 썼다.

이 시기 귀부인의 화장방은 여성이 바깥으로 나가기 전 씻고 치장하는 사적 공간이지만 사교 공간이기도 했다. 귀부인은 화장방에서 아침부터 애인과 상인 등이 많은 이들을 접견했다. 잠자리에서 갓 일어난 차림으로 접견을 시작해 방문객들이 보는 앞에서 몇 시간에 거쳐 머리와 몸치장을 했다. 화장방 침대 옆에는 실내용 변기를 감춰둘 수 있는 캐비닛을 두기도 했다. 방은 청결과 교양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미덕으로 가려지지 않는 몸의 진실이 공개되는 장소였다.

화장방의 중심은 거울이 달린 화장대다. 이 시기 일본식 옻칠 화장대는 당시 ‘동양풍’ 애호가들 사이에 ‘재팬 화장대’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물건을 수집한 취미방도 있었다. 특히 귀족 여성들은 인형집에 온갖 이국적이고 화려한 미니어처를 전시하고 자신의 취향을 뽐냈다. 1718년에 네덜란드를 여행한 한 여행자는 페트로넬라 오르트만의 인형집 가격이 2만에서 3만길더 사이라고 기록했다. 거의 실제 집값에 상응하는 가격이었다. 과장된 가격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이 기록은 네덜란드 인형집이 그만큼 화려한 스펙터클로서 이방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을 방증한다.

세계일보

민은경·정병설·이혜수 외 / 문학동네 / 2만5000원


당시의 지극히 사적일 것 같은 공간은 제국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저자들은 전한다. 본격적으로 반려동물을 기르기 시작한 18세기의 초상화에는 애완동물이 함께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그와 함께 은목걸이를 한 흑인 시동도 종종 등장한다. 당시 애완동물의 유행에는 흑인 시동이 포함됐음을 ‘살림을 감독하는 임피 부인’ 등 당대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1807년 노예제 폐지법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기 전까지 영국과 식민지에는 노예가 존재했고, 부유층 여성은 흑인 시동을 거느렸다. 이들은 하인에 속했지만 사실은 재산으로 거래됐고 원숭이처럼 부와 유행을 과시하는 전시용이었다. 주인의 초상화나 가족 초상화에 절대 등장하지 않는 다른 하인과 달리 흑인 시동은 애완견, 원숭이, 앵무새와 함께 애완동물로서 포함됐다는 것이다. 흑인 시동은 마치 개 목걸이를 연상시키는 은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책은 문학, 역사, 미술·디자인·조형, 도시·건축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로 18세기 서양의 방을 둘러본다. 당시 사람들의 내밀한 공간을 들여다보며 욕망과 사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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