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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여적]‘장마’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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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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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댐 방류와 지난밤에 내린 폭우로 인해 한강 수위가 올라가면서 3일 낮 서울 반포대교에서 내려다본 반포한강공원이 물에 잠겨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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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순우리말이다. ‘길 장(長)’에 물의 옛말인 ‘마’가 합쳐진 데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삼을 잘 자라게(長麻)’ 하는 비에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 한자어로는 ‘임우(霖雨)’ ‘적우(積雨)’ ‘구우(久雨)’를 주로 썼다. 물이 찰 정도로 오래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매실이 익을 무렵 내린다는 ‘매우(梅雨)’도 장맛비다.

장마의 또 다른 이름은 ‘고우(苦雨)’다. ‘고통스러운 비’라는 의미다. ‘오뉴월 장마에 토담 무너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거센 장맛비에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떠내려가는 게 많다. 농사에는 더 해롭다.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 ‘3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그렇다고 장마의 이미지가 꼭 답답하고 눅눅한 것만은 아니다. 도도히 흐르는 붉덩물을 보았는가. 온갖 찌꺼기를 씻겨내는 장맛비는 자연의 청신 작업이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김소월은 시 ‘왕십리’에서 장맛비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왕십리에 내리는 비가 한 닷새 이어지는 장맛비가 되었으면. 그래서 천안삼거리 주막의 객들이 비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내 임도 오래 더 머무르기를 바란다.

기상학적으로 장마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세력을 확장해 북쪽의 찬 고기압과 만나면서 정체전선을 형성해 뿌리는 비를 말한다. 장마전선이 한 달 넘게 한반도 상공에 머무르면서 물폭탄을 퍼붓고 있다. 올해 장마는 기후변화로 국지성 집중호우가 많은 게 특징이다. 그래도 전선이 만주로 북상하면 장마는 끝이 난다. 문제는 형성·소멸을 반복하는 기상현상이 아니다. 고기압 정체전선처럼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부동산 투기, 산업재해, 갑질, 성폭력은 장마의 기상전선보다 더 길고 강고하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아들을 각각 국군과 빨치산으로 전쟁터에 내보낸 두 할머니가 긴 장마철 내내 갈등하다가 장마가 끝나면서 화해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소설처럼 장마전선의 소멸과 함께 음울한 ‘사회적 장마’까지 확 걷히기를…. 한여름밤의 꿈일까.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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