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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이범준의 도쿄 레터] 대화를 위한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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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0년대 초반 쓰이기 시작한 ‘꽃미남’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이 뜻을 묻는 단어다.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에서 왔지만 본래 뜻과는 무관한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뜻인 일본 속담 ‘꽃보다 경단’에서 경단과 남자의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점에 착안한 만화 제목을 줄였다. 우리식으로 하면 ‘금강산미남’과 비슷해 대부분 일본인들은 꽃미남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한다. 꽃미남이 <꽃보다 남자>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주면 한국어를 아는 일본인도 놀라워한다.

경향신문

지난 3일 도쿄 분쿄구에 있는 출판사 고단샤에 이 회사가 만든 책들이 전시돼 있다. 고단샤는 연 매출액이 1200억엔(1조3500억원)을 넘는 일본 최대 출판사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인상을 타면서 데뷔한 잡지 ‘군조’도 이 회사가 펴낸다. 1909년 창립한 고단샤에서 수많은 일본어가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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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64>에는 가출한 딸을 찾는 부모가 나온다. 나이가 비슷하고 연고가 없는 시신이 발견되면 어디든 달려가 확인한다. 이번에도 딸이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전차를 기다린다.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한국어 자막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이다. 하지만 열차가 연착하지도, 사고가 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으레 쓰는 표현이다. 주문받은 음식을 3분 만에 내오면서도 하는 말이다. 이 장면에서는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가 우리말에 가깝다.

지금 일본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공식 장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을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를 어기고 있다고 일본 언론은 비판한다. 일할 생각이 없으면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말까지 나온다. 신문들은 코로나19 이후 아베 총리의 발언을 되짚으며 정치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기자회견에서도, 국회 답변에서도 전문가 의견을 따른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고 했다. 야당은 이제라도 방역과 경제를 저울질해 정치 판단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던 지난 3월 한국·중국 등을 입국금지 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최종적으로 정치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 판단을 위해 경제적, 의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했느냐는 지적은 있었지만, 정치 판단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가 정치적 판단을 시인했다며 비판하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일본어 ‘세이지 한단’과 한국어 ‘정치 판단’은 한자만 같을 뿐 쓰이는 의미가 다르다. 이 경우 일본에서는 책임, 한국에서는 정략의 의미로 쓰였다.

도쿄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비즈니스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주로 일본 회사에 취업할 외국인 학생이 대상인데 일본인 학생도 모르는 내용이 많다고 한다. 유명 대기업 출신인 강사는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도 같은 수업을 한다. 과정이 끝날 무렵 일본인처럼 말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에 하지 않는 것이었다. 주제 정도를 꺼낸 다음 상대방 말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할 것이고, 거기에 맞춰 다음 말을 이어가는 게 좋다고 했다.

세상에 말로 풀지 못할 갈등은 없다. 말로 풀지 못하면 못 푸는 것이다. 힘으로는 못 푼다. 대화의 전제는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다. 농구장에선 손을 써야 하고, 축구장에선 발을 써야 한다. 한국은 일본을 안다고, 일본도 한국을 안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해 그렇게 밝은데도 사이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양국이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핵심을 말하지 않고 에두르는 사람들과, 칼로 찌르듯 결론에 치닫는 사람들 사이에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한지 이 시절에 생각해본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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