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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이철호 칼럼] 산뜻한 ‘윤희숙 현상’…정권의 급소를 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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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시장 친화적 대안으로

수도권 중도층 공감 얻어야 한다

어떤 정부도 시장 이길 수 없고

어떤 정권도 민심을 이길 수 없다

중앙일보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현미 장관이 다음 달 22일이면 역대 최장수 국토부 장관이 된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을 위해 1187일간 재임한 정종환 전 장관의 기록을 누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고집도 대단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부동산 아집은 훨씬 집요하다. 참여형 플랫폼 비체인저의 최근 조사에서 투표자의 82.1%가 “김현미 장관의 해임에 매우 동의한다”고 응답했다. 해임 요구에 동의하지 않은 응답은 2.4%였다. 그런데도 22번의 헛발질을 한 김 장관을 싸고돈다.

김 장관은 지난달 9일 크게 한번 흔들렸다. 6·17 부동산 대책마저 실패하자 유력 대권후보인 이낙연 전 총리가 “결과적으로 부동산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김현미 경질론에 대해) 정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치고 나왔다. 민심이 나빠지면서 이 전 총리가 독자 행보로 차별화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문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김 장관은 바꾸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더 이상 경질론 나돌지 않도록 강하게 대응하라”는 지시까지 덧붙였다는 이야기가 청와대 담장 밖으로 흘러나왔다. 곧바로 속보 기사들이 쏟아졌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전화 통화로 ‘김 장관 경질은 없다’는 똑같은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눈치 빠른 이 전 총리는 이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김현미 장관에 대한 발언은 쏙 들어갔다. 청와대 분위기에 민감한 정세균 국무총리도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부동산은 이미 문재인 정권의 뇌관이 됐다. 단순히 아파트 값이 많이 오른 차원이 아니다. "부동산은 자신 있다” "11%만 올랐다” "부동산 대책이 다 작동하고 있다”는 발언들이 민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아마 차기 대선까지 뜨거운 감자가 될 게 분명하다.

지난주 윤희숙 통합당 의원의 국회 5분 발언이 더 큰 울림을 부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대부분 “저는 임차인입니다”는 모두 발언에 박수를 쳤지만 오히려 더 공감 가는 부분은 말미에 있다. “이 법을 만든 분들, 그리고 축조심의 없이 이 프로세스를 가져간 더불어민주당은 우리의 전세 역사와 민생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며 연설을 마쳤다. 정치인 특유의 막말과 비방·야유가 없었다. 따분하게 써온 원고를 읽는 게 아니라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 문법의 연설도 산뜻했다. “퇴진하라” “해임하라”는 상투적인 주문도 없었다.

윤 의원 발언의 핵심은 임대료 등 시장 가격에 함부로 손대면 시장이 발작을 일으키고, 그 혼란은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간다는 경고다. 최저임금을 마구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사전에 치밀한 시뮬레이션도 없었다. 그냥 최저임금 1만원이 대선 공약이라며 밀어붙였다가 일자리가 줄어들고 양극화만 심화되는 참사를 빚었다. 임대차 3법도 닮은 꼴이다. ‘미친 전세’를 잡겠다고 임대료를 묶으면 전세 자체가 멸종돼 월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원론에 나오는 합리적인 추론이다.

윤 의원 발언에 민주당은 경련을 일으켰다. 급소를 찔린 것이다. 온 사방에서 윤 의원 저격에 나선 것도 그만큼 뼈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전도 못 챙겼다. 박범계·윤준병 의원은 윤 의원을 향해 “임차인처럼 위장했다”고 비난했다가 자신들이 다주택자임이 드러나 망신살만 뻗쳤다. 일부 의원들은 “전세보다 월세가 선진국”이라 홍보하다 가뜩이나 상처받은 57% 무주택자에게 2차 가해를 했다. 이런 여권 저격수들의 막말 공세와 비교하면 모처럼 보수 야당의 윤 의원 연설은 품격이 남달랐다. 미셸 오바마 미국 전 영부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when they go low, we go high(그들이 저질스럽게 갈 때 우리는 품격있게 간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산뜻한 ‘윤희숙 현상’과 비교하면 지난 주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의 발언은 별 반향이 없었다. “독재 정권” “경제라인 문책” “주택 소유를 범죄시하는 것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라는 독한 표현을 썼지만 정작 여권은 시큰둥한 분위기다. 오히려 또 색깔론이냐는 소모적인 역공의 빌미만 주었다. ‘기-승-전-빨갱이’ 논리는 우파 집회에선 통할지 몰라도 수도권 중도층에겐 낡고 따분한 논리다. 공감은커녕 비호감만 증폭시킬 뿐이다. 지난 4월 총선 참패 속에서도 간신히 합리적 보수와 통합하고 극우 세력을 내친 성과마저 제 발로 차버리는 자충수나 다름없다.

옛말에 ‘승리는 기념하고 패배는 기억하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선 압승에 취해도 너무 취해 난폭운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통합당은 총선 참패를 곱씹으며 ‘윤희숙 열풍’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통합당이 부활하려면 정부·여당의 헛발질이나 반사이익만으론 부족하다. 무턱대고 거리로 나와 삭발하고 단식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제2, 제3의 윤희숙이 나와 이념 지향적인 민주당이 할 수 없는, 현실에 바탕을 둔 과학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수도권 중도층의 민심을 얻어야 문재인 정권도 긴장한다. 어떤 정부도 시장을 이길 수 없고 어떤 정권도 민심을 이길 수는 없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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