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마필관리사 또…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왜 매번 다쳤다고 날 질책하는지…”

30대, 유서 남긴 채 극단적 선택

문중원 기수 등 벌써 10명째 희생

동료 “업무량 과도…퇴원 독촉도”

노조 “관리권한 마사회 책임져야”


한겨레

말을 관리하는 서울경마장 마필관리사들의 모습.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의 여가선용에 기여한다’는 한국마사회에서 마필관리사가 또다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다단계 하청 구조의 경마산업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마필관리사의 죽음은 2005년 이후 벌써 여섯번째다. 지난해 11월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문중원 기수 등 마필관리사와 비슷한 처지의 기수들도 4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민의 건강한 레저활동을 추구한다는 마사회에서 무엇이 이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있을까.

지난달 21일 마필관리사 이아무개(33)씨가 서울경마장 사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택에는 이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두달 전인 5월26일 작성한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유서에서 이씨는 “매번 다치고 쉬고 해서 미안한 직장 동료들. 주목받지도 못하는 관리사, 정말 힘들죠?” “한국 경마는 우리가 있어서 발전했는데 모든 건 마사회 몫이죠. 정말 열심히 하는데. 왜 사람이 죽어나가야 (마사회가) 그나마 잠깐 느끼는 것인지” “매년 다치니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나. 왜 내가 매번 다쳤다고 질책을 받아야 하나. 난 다치고 싶지도 아프고 싶지도 않은데 말이지”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동료들에 따르면 이씨는 근무 강도가 세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통상 마필관리사 1명이 말 3필을 관리하지만 이씨는 마필관리사 11명이 37필을 관리하는 조에서 일했다. 경마가 끝난 뒤 말이 한꺼번에 몰렸을 때는 11명이 70필까지 관리해야 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까지 6년 동안 이씨와 같은 조에서 일했던 마필관리사 김영훈(50)씨는 “바쁠 때는 이씨가 하루에 10마리까지 훈련시킨 적도 있었다. 우리 조가 경마장에서 말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며 “일이 너무 많아서 이씨가 숨지기 2주 전에도 쉬고 싶다며 휴가를 신청했지만 조교사가 반려했다고 들었다. 이씨가 ‘출근하기 두렵다’는 말을 한 적도 많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말을 관리하는 서울경마장 마필관리사들의 모습.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조보다 말을 많이 훈련시키는 만큼 다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이씨는 적어도 1년에 두번씩은 크게 다쳤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말굽에 차여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등의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조교사의 압박 때문에 쉬기 어려웠다고 한다. 김씨는 “이씨가 말을 타고 훈련시키다 고삐에 엄지손가락이 감겨 부러진 적이 있다. 더 오랜 기간 입원했어야 하는데 한달 만에 퇴원했다. 조교사가 ‘꾀병 아니냐’며 이씨에게 빨리 출근하라고 압박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말했다.

다른 마필관리사들의 근무환경도 이씨 못지않게 열악하다는 게 마필관리사 노조의 주장이다. 마필관리사는 기수와 함께 조교사에게 고용돼 일을 한다. 노조에 따르면 마필관리사 산재율은 2016년 기준 13.98%로 전국 산업 평균 0.52%의 27배에 이른다. 게다가 서울경마장조교사협회는 2018년 기준 산업재해 보고의무를 가장 많이 위반한 사업장이기도 하다. 김보현 한국노총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조 서울경마지부장은 “산재 발생 시 미보고하는 경우가 많다. 산재 은폐 정황을 밝히기 위해 조교사협회 등에 진료기록을 요청했으나 아직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경마산업 특유의 구조도 마필관리사와 기수의 극단적 선택을 막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경마산업은 마사회가 말을 소유한 마주와 경주마 출주 계약을 맺고, 조교사에겐 마방을 임대하고 면허를 교부하며, 조교사는 마필관리사를 고용하는 ‘다단계 하청 구조’로 돼 있다. 이를 이유로 마사회는 마필관리사의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마필관리사에 대한 실질적 업무 지시와 관리 권한은 마사회에 있다는 게 마필관리사노조의 주장이다. 김보현 지부장은 “마사회는 실질적 사용자로서 조교사 면허증을 발부하고 마방 임대 권한으로 조교사를 통제하며 마필관리사 고용을 승인하고 징계할 수 있는 등 모든 권한을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공공운수노조가 2019년 전국 경마장의 기수들을 상대로 마사회가 마방 운영에 미치는 영향(정도)을 물은 결과 59.4%가 최고 점수인 10점을 줬다.

한겨레

말을 관리하는 서울경마장 마필관리사들의 모습.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조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조교사도 마필관리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필관리사 임금에 직결되는 등급 조정이 가능하고 상금이 적게 배분되는 조로 보낼 수 있는 등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이 마사회에 미치지는 못한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조교사들은 마필관리사에 대한 인사권은 갖고 있지만, 말이나 해당 시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등을 지키기는 어려운 구조다. 개별 조교사가 해당 책임을 지기 어려운 만큼 모든 권한을 독점한 마사회가 이들을 직고용하는 등 공기업으로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마사회 관계자는 “업무 환경이 영향을 미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극단적 선택을 할 만큼 가혹한 근무환경은 아니었다고 본다. 고용 주체는 조교사협회이고 이씨의 죽음은 마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 협의체를 통해 계속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서울경마장조교사협회는 “조교사가 ‘다치지 말고 일하자’는 취지로 얘기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다르게 느꼈던 것 같다. 이씨가 입원했을 때 복귀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극단적 선택과 관련된 협회의 책임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채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