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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미투’ 2년 반… 관심·대책 희미해졌지만 ‘의지’는 더 뚜렷해졌다 [미투, 그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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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약속, 그 후<끝>

2018년 미투 운동 확산에 이목 집중… 국회, 관련법 발의 불구 24%만 통과

관계부처, 대책만 세우고 점검 ‘뒷전’… 실효성 떨어져 ‘요란한 빈 수레’ 지적

“폭로 이후 주변서 응원해줘 큰 동력”, 피해자 ‘더 나은 삶’ 위해 목소리 높여

세계일보

그래서 세상은 바뀌었을까.

“사건 이후 그냥 이름을 바꾸고 조용히 숨어 살아도 되는데 그러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섰던 건 이렇게 하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투 참여자 A씨의 말이다. 세계일보가 직접 만난 16명의 미투 참여자 대다수는 ‘미투를 통해 조금이라도 세상이 바뀌길 바랐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가 바뀔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들의 입을 열게 한 동력이었다. 용기를 낸 미투 참여자들에게 화답하듯 정부와 각 기관은 다양한 대책을 내놓으며 성폭력 근절을 약속했다. 그 후 2년 반. 처음의 떠들썩한 화제성은 지나갔고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를 외치던 사람들의 관심은 희미해졌다. 그 많았던 대책들은 어떻게 됐고, 그때 그 약속들은 지켜졌을까.

◆허점 드러난 ‘컨트롤 타워’

정부는 2018년 초 미투 운동이 불붙자 그해 3월 여성가족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협의회는 지난해 말 여성폭력방지위원회로 확대 개편됐고, 지난 2월에는 ‘제1차 여성폭력방지정책 기본계획(2020∼2024)’을 내놨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도 실제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가부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이 폭로된 지 석 달이 지난 2018년 6월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만들어 공개했다. 공공기관이란 한국은행, 중앙부처 소속 공공기관, 공기업, 지방자치단체 출연·출자기관 등을 말한다. 안 전 지사나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선출직 지자체 기관장이 성범죄 가해 당사자일 경우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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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박 전 시장 사건에서도 여가부의 소극적인 대처는 도마에 올랐다. 여가부 관계자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지자체 기관장도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준해 처리하면 된다”며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관의 장이 성폭력 행위자일 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어 조만간 보완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2018년 여가부는 기관장을 대상으로 특화 교육과정을 마련해 실시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성희롱·성폭력 등 4대 폭력 예방교육 점검 때 기관장 참여 여부를 확인하도록 강화했을 뿐이다.

◆대책 세웠지만 점검은 ‘나 몰라라’

미투 대책으로 마련된 제도는 많지만 실효성과 현장 상황에 대한 점검은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도 시행의 경과나 성과에 대한 자료가 없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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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부에서 운영하는 ‘성희롱·성폭력근절종합지원센터’의 경우 피해자 지원과 사건처리지원단 파견, 외부 기관 컨설팅 등 종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 기관임에도 성과나 실효성을 판단할 지표조차 없다. 여가부 관계자는 “종합지원센터와 관련해선 단순 상담 건수나 컨설팅 건수 통계만 있고 실제 법적 절차나 피해 복구 절차로 이어진 건수 등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않고 있다”며 “피상담자 만족도 등 지원·상담에 대한 질적 평가 역시 진행 중인 건 없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 점검단’이 생기면서 그해 3∼6월 공공기관 1942개를 상대로 이루어진 성폭력 특별점검 전수조사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실 관계자는 “당시에 점검했던 결과 보고서를 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는데 받지 못하고 있다”며 “그해 7월에 정부가 내놓은 성희롱·성폭력 근절 보완대책에 점검 결과를 반영했다고 설명한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권 의원은 지난 3일 국회 여가위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대형 사건 때 여가부가 신속히 조직 점검 결과를 갖고 재발방지책을 냈다면 다른 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한 공직사회 성범죄 예방 효과를 거두지 않았겠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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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효성’ 도마 오른 각 분야 성폭력 대책

미투 운동이 각계에서 일어나자 여가부는 물론 관련 부처들도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특히 문화예술계의 미투가 이어지면서 정부는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예술인 권리보장법)’을 제정해 예술인의 성희롱·성폭력 피해와 권리구제를 약속했다. 이 법안은 지난해 4월 발의됐는데 이후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원회, 전체회의, 법안심사소위 등을 거치는 동안 논의된 건 딱 한 번뿐이다. 정부와 여당에 법안 통과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20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된 이 법안은 21대에 재발의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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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성폭력 근절 대책인 ‘교육 분야 성희롱·성폭력 온라인 신고센터’도 유명무실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배준영 미래통합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3월 설치된 온라인 신고센터는 담당 인력이 2명뿐이다. 인력 부족으로 인해 지난 7월까지 접수된 313건 중 185건만 처리 진행 중이거나 완료됐다. 징계 처분은 185건 중 45건에 그쳤다. 교육부 관계자는 “충원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적합한 인력을 물색하는 중이지만 자격 요건 등 제약이 많아 아직까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미투 대책과 관련해 여성의당 김진아 대표는 “정부가 미투 대책 이후 과정에서 자원과 인력을 제대로 투입하지 않고 있는 것은 속출하는 성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성범죄 처벌 형량도 최대 상한선을 개정할 뿐 하한선을 개정하는 방향으로는 흘러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2019년 성폭력안전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방지를 위한 각종 법률과 제도에 대해 여성 응답자의 72%는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용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 남성의 경우 69.7%가 동일한 응답을 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여성과 남성 각각 14.3%와 14.7%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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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법안 통과율 24.1%… ‘비동의 간음죄’ 법안 모두 폐기

관련 법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2018년 2월 이후 20대 국회에서는 400여건에 달하는 성폭력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법안은 쏟아졌지만, 실제 통과된 법안은 많지 않았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미투 이후 1년간 20대 국회가 발의한 미투 관련 법 145건 중 35건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통과율은 불과 24.1%였다.

미투 대책의 핵심 쟁점인 ‘비동의 간음죄’와 관련해 발의된 법안 10건도 모두 20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 처리됐다. 폭행이나 협박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강제적 간음을 처벌해야 한다는 비동의 간음죄는 2018년 미투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활발히 발의됐음에도 끝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도 개원 며칠 만에 다시 비동의 간음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미투 관련 법안의 또 다른 핵심인 ‘사실적시 명예훼손 축소 혹은 폐지’ 관련 법안도 모두 통과되지 못했다. 미투 참여자에 대한 역고소를 제지하기 위해 사회 곳곳에서 도입 목소리가 높았지만 발의된 17건 중 1건은 철회, 16건은 임기만료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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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어두워도 연대하는 미투 참여자들

미투 대책과 성폭력 근절 약속이 겉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피해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특히 최근 문단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 이상 숨지 않고 연대하며 대응을 이어가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예전엔 피해자 한 명이 대표로 나서고, 큰 책임을 지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숨어있던 다른 피해자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증언을 보태고 있다. 지난달 말 불거진 시 전문 월간지 ‘시인동네’ 편집자 고영 시인 논란은 이런 변화를 뚜렷이 드러냈다. 고영 시인이 신인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신인 작가에게 사전 연락해 문단 내 권력을 행사했다는 이유운 작가의 첫 폭로를 시작으로 다수의 피해자가 그에게 입은 성추행 피해 등을 이어서 밝혔다. 시인동네는 폐간이 결정됐다.

취재팀이 만난 2016년 배용제(54) 시인 상대 미투 참여자들도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배 시인은 미성년 제자들을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2018년 대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확정받았다. 문단 내 성폭력 미투 중 유일한 징역 사례다. 미투 참여자 5명 중 한 명인 B(25)씨는 “원로시인 고은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의 승소나 고영 시인 폭로 이후 대처 등을 보면 느리지만 어쨌든 사회는 바뀌고 있다. 용기 낸 이들의 고발에 귀 기울이며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법정에 서서 싸움을 이어가는 건 피해자 혼자지만 그때 다른 이들의 응원과 연대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고 말했다. 배 시인의 또 다른 피해자 C씨(25)도 “우리의 미투 당시 많은 이들이 연대해줘 화제가 됐다”며 “그래서 처음엔 망설였던 고소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결과를 함께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g1@segye.com

세계일보 홈페이지에서 ‘미투, 그 이후의 삶’에 담지 못한 이야기,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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