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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 홍예원 움직임 연출가 [못다 한 이야기-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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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그는 ‘나는 싸움닭으로 유명하고, 위계에 눌리는 스타일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나의 고발로 우리 집단의 작업이 멈춰서게 된다면 머뭇거리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성폭력반대 연극인 행동’(성반연)에서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기 위해 활발히 활동해 온 홍예원 움직임 연출가를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났다.

-2018년 2월부터 성반연을 조직해 활동하고 계신데요, 참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8년 2월 중순 페이스북에 거장 2명에 대한 미투글이 올라왔어요. 그리고 바로 설 연휴가 시작됐어요. 저는 정말 너무너무 충격을 받아서 설 직전에 친한 동료들한테 일단 만나자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그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흐지부지됐어요. 그리고 설 연휴 내내 핸드폰만 보고 있었죠. 연휴 끝나자마자 다시 모여서 저희끼리 농담으로 ‘설 연휴 30시간 이상 페북 본 사람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죠. 그리고 일단 다들 만나자고 대학로엑스포럼에 글을 올렸어요. 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누구든, 우리 좀 다 같이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리고 그 날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 발족했죠.”

-금방 결성이 됐네요?

“이게 아주 생소한 방식은 아니에요. 연극인들은 그 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었고, 그때부터 어떤 사안이 생겼을 때 모여서 토론하거나 성명서 내는 게 익숙해진 상태였어요. 대학로엑스포럼이 대표적이죠. 2014년 말에 만들어졌는데 누구든지 의견을 남길 수 있는 플랫폼이 됐어요. 그러니까 미투가 나왔을 때 ‘어떻게 하지?’로 끝나지 않은 거죠. 모여서 얘기한 경험이 있고 동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2월19일 이윤택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죠. 너무 화가났어요. 기자한테 사죄할 일이 아닌데 왜 기자회견을 하냐고요.”

-그래서 빠르게 진행됐군요.

“21일에 모이기로 하고 준비를 했어요. 다음날 새벽에 성반연이 결성됐고, 어마어마한 일들이 쏟아졌어요. 언론대응에서 저희가 신경 썼던 부분은 ‘연극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발생한 기형적인 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라는 거였어요. 언론에서 자꾸 그런 프레임으로 이야기를 가져가려는 게 보여서 좀 화가 났어요. 사실 기자님 회사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잖아요. 익명과 기명 제보들도 들어왔죠. 제보 양상도 다양해서 사건을 고발하고자 하는 동료, 연대를 요청하는 동료, 아직 자신도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 동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이런 문제를 다룰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사로 활동 중인 동료의 조언을 듣고 워크샵도 하면서 체계를 갖춰나갔어요.”

-이윤택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전혀 모르셨나요?

“‘이윤택이 그렇다더라’는 식의 말은 분명히 들은 적이 있어요. 문제는 정확히 사실인지 모를 뿐더러 밝히고자 하는 피해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하지만 이런 것도 있어요. 지금의 저와 그때의 저는 달라요. 지금의 내가 그때 돌아가면 문제 될 것들이 많이 보일 거예요. 그때는 문제적 발언·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말이에요. 그래서 ‘그때 알고 있었냐’는 질문이, 저한테는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내 시선이 바뀐 걸까’ 이런 물음으로 이어지네요.”

-좀 전에 프레임 말씀하셨는데, 물론 연극계라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각 분야별로 특수성이란 게 있잖아요. 연극계에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그런 특징 같은 건 있지 않나요?

“연극계는 문제를 공론화하는 게 쉽지 않은 구조예요. 일반 회사는 하다못해 익명게시판 같은 게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연극은 회사도 아니고 프로덕션 한번하고 끝. 이런 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어요. 저 사람이 내 생사여탈을 쥐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반대로 이것만 참고 끝나면 되는데 이기도 한 거예요. 두 개가 완전히 다른 결인데 같이 가요. 이윤택 같은 경우는 생사여탈을 쥐고 있었겠죠? 그건 단지 극단을 나간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연극계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문제 제기하기 애매한 게 일주일만 참으면 공연하고, 공연을 2주하면 끝나요. 그런데 이 공연은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그럼 이걸 엎을 것이냐, 이런 고민이 되는 거예요.”

세계일보

-위력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문화’ 이런 게 공론화를 어렵게 한단 얘기군요.

“이 일이 막 돈을 많이 버는 그런 건 아니예요. 그런데도 하는 거예요. 그만큼 이 일이 우리한테 너무 중요하단 뜻이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 나한테 성범죄를 저질렀어요. 그런데 그 사람 빼면 다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연기를 너무 사랑하고, 공연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이 그랬다’고 말하고 우리 모두의 공연을 엎는 건 쉽지 않죠. 엄청난 딜레마예요. 이런 부분이 굉장히 힘든 문제인 거죠. 마치 사랑하는 걸 배반해야 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저도 싸움닭으로 유명한 인간이고, 위계에 눌리지도 않지만 저 역시 비슷한 상황에선 고민이 될 거 같아요.”

-보통 회사라면 만약 부장이 잘못했다, 그럼 부장을 인사조치하면 되거든요. 그걸로 부서 일이 스톱되거나 하진 않아요. 연극계는 다른가 보죠?

“연출을 바꾸는 건 부장 바꾸는 거랑 달라요. 큰 극장에서 제작하고 연출을 고용했다, 그럼 모르겠어요. 하지만 보통의 대학로 소극장 연극에서는 연출이 작품 쓰고 동선 짜고 다 해요. 연출 한 사람이 빠지면 작품이 안 되는 거예요. 작가,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또 최소 한달을 호흡 맞추는데 이걸 어떻게 대체할 거예요? 결국 어떤 사람을 뺀다는 건 작품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술계 특수성을 담은 예술인권리보장법안이 발의됐잖아요? 통과는 안 됐지만…

“사실 권리보장법은 블랙리스트 이후부터 준비됐어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 문재인 캠프에서 예술인에게 약속했던 과제이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당차원에서 해결하겠다고 해서 만들어진 법안이었는데, 말만 했던 거죠. 거기 들어갈 문구 하나하나를 예술인들이 변호사 자문 받아가며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의원실, 저 의원실 떠돌다가 결국 김영주 의원실에서 발의를 했는데 결국은 통과를 안 시켰죠. 아니, 못 시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법안심사소위에 올라가기 전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어요. ‘이 법이 꼭 통과돼야 한다’ 이런 걸 호소하는 자리였죠. 그리고 상임위(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쭉 돌고 있는데 야당 의원실에서 ‘공청회를 거치지 않아 심사소위에 안 올라갈 거다’란 얘기를 들은 거예요. 너무 황당했죠. 부랴부랴 알아보니까 상임위 의결을 거치면 공청회를 생략할 수 있대요. 그래서 어쨌든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까지 올라갔는데, 결국 통과가 안 됐어요. 공청회 생략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어요. 야당 의원들이 공격하고 그러는데 여당 의원도 그렇고 문체부 장관도 대응을 잘 못하고 다들 너무 무능해보였어요.”

-그동안 달라졌다 싶은 부분은 어떻게 있나요?

“성반연에서 저희끼리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최소한 우리는 달라졌잖아’. 저는 정말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저만 해도 제가 예전에 썼던 표현 중에 혐오스러운 게 많아요. 또, 미묘하게 기분 나빴던 상황에서 그게 뭐가 문제여서 그랬던 건지 이젠 알죠. 내 안에서 언어가 정리된 것 같아요. 또, 저와 같은 동료들이 어디 있는지 알죠. 그건 엄청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늘 ‘너만 예민한 거야, 그냥 좀 좋게좋게 살아’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 이젠 손 잡아 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이 생긴 거잖아요. 하지만 여전히 안 변한 것도 많아요. 특히 30대 제 또래 스스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더 젊은 세대 중에는 성폭력 예방교육할 때 보면 ‘아, 저건 너무 페미’ 이러면서 아예 안 들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지금도 미투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제가 뭐라고 무슨 말을 해주겠어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것 같아요. 저는 ‘피해자 중심주의’란 말이 좀 위험한 것 같아요. 마치 모든 해결책을 피해자가 찾아야 할 것 같잖아요. 문제가 불거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공동체 시스템에 따라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성범죄 발생시 매뉴얼이 중요한 거예요.”

정리=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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