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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오늘의시선] 여성가족부의 존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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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사건 함구는 직무유기

성평등 막는 모든 주체에 맞서야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라는 아우성이 국회 울타리를 넘어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에 회부되어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안의 경중이나 내용과는 무관하게 여성가족부가 무언가를 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여성가족부를 통해서 발화될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물리려는 재갈과도 같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이미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 폭력과 불평등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증상일 뿐, 오히려 여성가족부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이 와중에 터져 나온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보인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의 모습은 실망스럽다기보다 그저 안타깝고 착잡하기만 하다. 실망이나 분노도 기대가 있어야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성특별위원회의 신설에서부터 오늘의 여성가족부에 이르는 20여년 동안 탄생과 부침의 시간을 함께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실망도 분노도 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다.

세계일보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한 여성가족부의 뒷북 대응과 여당 눈치보기라는 야당 의원의 비판에 대한 여성가족부 장관의 대답은 실소를 넘어 허탈감마저 들게 했다. “저희는 시민단체가 아니라서 (부처의) 입장 표명보다 대책 마련에 우선하다 보니 국민들께서 답답함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위계 및 위력에 의한 성범죄 문제가 이번에 처음 터진 사건인 양 너무나 미숙한 답변이었다. 이미 2년 전 서지현 검사와 김지은 비서의 성추행 폭로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수많은 미투는 무엇이었던가. 그 시간 동안 여성가족부는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어디에 가 있었기에 2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대책 마련에 분주해서 입장 표명 하나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허둥대고 있단 말인가. 변명의 여지 없이 직무유기이다.

그러나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 있는’ 직무유기라는 것이 여성가족부 장관의 모습을 더욱 안타갑게 한다. 1999년에 제정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여성특별위원회(이후 여성부)에 성희롱을 남녀차별로 간주하고 직권 또는 피해자의 구체신청에 의해 남녀차별 사례를 조사하고 남녀차별 여부를 결정하여, 조정·시정권고·고발에 의한 사건 처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었다. 그런데 2005년 여성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법률을 폐지하고 정부조직 개편이라는 명분하에 동 권한을 시원스럽게 국가인권위원회로 넘긴 것이 바로 국회였다. 지금의 여성가족부에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나 하고 매뉴얼이나 제작 배포할 수 있는 정도의 쥐꼬리만 한 권한이 남겨져 있을 뿐인데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주의 기운을 담은 대책을 요구하며 호통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보기가 민망하다 못해 가증스럽다.

국회는 이러니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라는 소리가 나온다고 질책하기에 앞서 또 눈앞에 있는 피해자는 무시해버리고 2년 전에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와 김지은 비서의 2차 피해를 막을 대책을 세우라는 뜬금없는 요구를 하기 이전에 여성가족부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 확대 대책을 내놓았어야 한다. 아니면 성희롱 직권조사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가인권위원장을 불러 질책했어야 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성추행과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 그리고 넘쳐나는 여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성가족부의 책임과 권한의 확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권한 부족이 더 이상 여성가족부의 ‘이유 있는’ 직무유기를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성차별 철폐와 성평등 실현을 위한 의제는 그 자체가 진보이다. 그렇기에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여성가족부는 성차별 철폐와 성평등 실현을 가로막은 모든 정치권과 집행부, 대통령에 맞서는 진정한 의미의 야당이어야 한다. 그것이 여성가족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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