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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육체를 넘어선 새로운 인간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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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한겨레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지음, 정성주 엮고 옮김/황금가지(2020)

한동안 좀 아팠다.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쳐서 생긴 증상이었는데, 온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입에는 쓴맛이 돌았다. 서글픈 것은 사람들이 나의 병을 “이제 나이 들어서 그래”라며, 신체 노화의 자연현상처럼 말한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몸은 소모품이니, 점점 기능이 떨어지다 언젠가 쓸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나 이런 필멸의 운명을 가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기도 하다.

켄 리우의 에스에프(SF) 작품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는 소모품인 육체를 벗어난 인간을 탐구하는 소설들이 담겼다. 삼국지의 관우를 모티브로 하여 중국인 미국 이민사를 그린 이야기나 소수민족의 매듭 문자와 단백질 접힘 알고리듬을 연결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포스트휴머니즘/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과 노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영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이 등장한다면 인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싱귤래리티 삼부작인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이 주제를 가장 명징하게 기술하는 소설들이다. 필멸의 육체를 벗어나 정신을 기계 속에 업로드할 수 있는 특이점이 도래한다. 대부분은 영원한 삶으로 떠나가지만 남은 이들은 유효기간이 다하는 육체와 함께하며 여기에 진정한 인간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이런 기술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켄 리우의 소설 속 인간들은 존재론적 혼란 속에서 끈질기게 인간성을 숙고한다.

신체를 무너뜨리는 병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 시대, 육신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데이터 패킷으로서 타인과 접선하는 시대에 이 책은 현재적 중요성을 띤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시대는 멀리 있지 않다. 인공관절이나 인공장기, 노화를 막는 기술들, 일상에 스며든 인공지능 기기들, 초월 인류를 향한 기술은 지금은 걸음마 단계처럼 보여도 그 모든 기술발전처럼 언젠가 앞에 와 있을 것이다. 그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너무 늦다. 켄 리우의 소설은 미래에 할 질문들이 아니라, 그 미래를 맞기 위해 현재에 필연적으로 해야 할 질문들을 묻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고통받는 육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나는 이 작품집 속 ‘심신오행’이라는 단편을 좋아한다. 인간의 의식이 몸을 구성하는 세포뿐만 아니라, 체내 미세 유기체에도 투사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즉,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은 우리의 뱃속 박테리아에 영향을 받는다는 러브스토리이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은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 사이에는 연결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쇠잔해가는 육체가 애틋하니 소중해졌다. 무엇보다 소설 내 처방처럼 프로바이오틱스라도 챙겨 먹으며 몸을 아껴서 잘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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