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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더오래]생면부지 여행객 두고 퇴근한 스페인 식당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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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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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베드라 성당.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며 폰데베드라에 도착했는데 공휴일이라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사진 박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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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문어로 하자. 폰테베드라에서는 무조건 문어를 먹어야 한대.”

슬픔에 빠져있는 마이클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어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연락이 문제다. 나는 인터넷만 가능한 심카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데이터를 모두 소진한 상태고 마이클은 통화만 되는 구식 폴더폰을 지니고 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어떻게든 전화를 하겠다고 한 후 헤어졌다.

‘오늘 저녁 아무래도 술을 많이 마시게 되겠군.’ 일종의 다짐을 하고 폭포수로 안마를 받는다고 상상하며 쏟아지는 빗속을 걸었다. 폰데베드라에 도착했는데 공휴일이라 문을 연 식당이 없다. 마이클을 만나기로 한 무엘레(Muelle) 광장으로 나가 식당을 찾아 주변을 헤맸다. 광장 모퉁이에 앉은 중년 부부가 종종거리는 동양 여자를 지켜보며 도저히 상황 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한 걸까? 아주머니는 손을 흔들어 나를 불렀다.

“식당? 모두 닫았어. 오늘은 휴일이에요.”

“너무 배가 고파요.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영업하는 식당이 없을까요?”

번역기는 대체 말을 어떻게 전달한 건지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나를 앞에 세워두고 갑자기 다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명백하다.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졌고, 답답한 상대와 대화할 때 짓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시선을 피하고 혼잣말을 하듯 따로 외면한 채 말했다. 영락없이 언쟁이다. 내가 남의 다툼에 끼어들 일도 아니고…. 자리를 비키려는 찰라 아주머니가 나를 향하더니 손가락을 모은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먹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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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엘레광장의 식당. 셔터까지 내렸던 광장 모퉁이의 식당 ‘아사도르 오 무엘레’의 주인 부부가 문을 열어줬다. [사진 박재희]



“문어는 없어요. 바로 저기가 내 식당이에요. 간단하게 음식을 해 줄게요.”

셔터까지 내렸던 광장 모퉁이의 식당 ‘아사도르 오 무엘레’의 주인 부부였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나를 이끌자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저씨가 문을 열고 식당 한쪽 불을 켰다.

마이클과 함께 주는 대로 먹었다. 파이와 수프, 생선에 감자, 그리고 새우까지. 문어는 없었지만 간단히 요기만 할 것이란 예상과는 다르게 식탁이 풍성해졌다. 식사를 하려는데 TV를 보는 아주머니는 자꾸 하품을 하는 듯했고 주문한 와인과 맥주를 가져다주는 아저씨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오래 있지는 않을게요. 오늘 이 친구가 슬픈 날이라서 조금만 얘기하다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들어가서 잘 거야. 편안하게 먹고 문을 닫고 가요. 열쇠는 화분아래에 넣어두고.”

그만 들어간다기에 계산을 하려는데 메뉴에 없는 요리라 가격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를 주면 되냐고 물었는데 파는 요리가 아니고 당신들이 먹던 것을 데워준 것이라며 그냥 됐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와인과 맥주를 시켰으니 술값만 놓고 가면 된다니. 휴일에 닫아둔 가게를 오직 우리 때문에 다시 열고 요리를 해 줬는데, 어찌 공짜란 말인가. 어쩔 줄 모르는 내가 허둥대는 사이 마이클은 바로 50유로짜리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오늘 제가 많이 슬픈 날입니다. 맛있고 따듯한 저녁을 먹고 친구와 함께 얘기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50유로는 너무 많다고 하는데 거스름돈은 절대 받을 수 없다며 마이클이 맞서자 그때까지 화가 난 듯 보였던 아저씨가 뚱한 표정을 거두더니 그 지방의 디저트 와인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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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와인. 우리는 마음에 드는 와인을 가져와 마시고 넉넉하게 계산한 현금을 올려두는 방식으로 어이없는 믿음의 댓가를 지불했다. [사진 박재희]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마시고 가요. 신사분의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 뭐 이렇게 괴이한 해피엔딩이 있단 말인가? 지어낸 것 같은 미담의 마무리는 부부가 알지도 못하는 외지인에게 열쇠를 맡기고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와인이고 맥주고 마음대로 꺼내 먹으면 어쩌려고? 우리는 마음에 드는 와인을 가져와 마시고 넉넉하게 계산한 현금을 올려두는 방식으로 어이없는 믿음의 댓가를 지불했다.

마이클은 세상을 버린 그의 첫 번째 부인 아들 다니엘과의 20년 추억을 떠올리며 많이 웃었고 더 많이 슬퍼했다. 10년 연상이던 전부인 소생이던 다니엘은 마이클보다 아홉 살 아래였는데 아버지와 아들보다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했다.

“본보기가 되거나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주지 못했어. 너무 후회가 되고 마음이 아파.”

상실에 회한이 없을 수 있을까. 되지 못할 위로보다는 말없이 들어주며 보조를 맞춰 와인을 마시는 편을 택했다. 제법 긴 회한을 접는 마지막에 마이클이 조금 눈물을 찍어냈다.

숙취도 있고 무엇보다 베드버그를 몰살시키는데 하루를 바치리라 마음 먹고 하루를 폰테베드라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세탁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 빨래가 바짝 말라 바스러질 정도 직전까지 수없이 동전을 넣으며 건조기를 돌렸다. 솔기 사이에 숨었을 스페인 빈대들도 모두 먼지가 되어버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필생의 사명을 완수한 홀가분함으로 쉬면서 평화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헬싱키 복병이 나타났다.

“숙소에서 개를 세 마리나 키우다니! 개를 싫어하거나 알레르기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너무하지 않아…? 조식 포함이라고 하고 겨우 토스트 빵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로비에 있는 커피 캡슐이 오래된 것 같아. 너무하지 않아…? 숙소가 깨끗해도 요금을 두배나 받는 건 정말 너무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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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날의 자화상. [사진 박재희]



허점이나 잘못을 잘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맞는 얘기만 하는데도 정떨어지는 사람. 졸졸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이 여자야말로 정말 해도 너무하는 사람이었다. 쉬기로 했던 마음을 빨래와 함께 접어 배낭에 넣었다.

“반나절이나 지났잖아. 너무 늦은 거 아냐?”

아니! 아니라고! 출발이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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