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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김동률칼럼] 治하기 위해 존재하는 官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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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위주 막무가내 교통행정

안전보다 스티커 발부에 연연

과태료·범칙금 사상 최고 경신

합리성이 배제된 행정은 폭력

나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교통법규를 지키는 사람으로 자부해 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고 법규 위반도 일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니 그리 생각해도 좋을 법하다. 그러나 최근 납부한 과태료는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행정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이다. 구파발 쪽으로 구기터널을 지나면 횡단보도가 있다. 이른 새벽, 횡단보도에 녹색등이 켜졌다. 잠깐 멈춘 뒤 좌우를 살피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지나갔다.

세계일보

김동률 서강대교수 매체경영


주말 등산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횡단보도. 당연히 새벽 시간에는 인적이 없다. 그러나 얼마 뒤 과태료를 내라는 엽서가 날아들었다. 엽서에 나와 있는 이의신청 절차에 따라 경찰서 교통계에 사정을 설명했다. 이른 새벽 시간, 잠시 멈추고 횡단보도 좌우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 후 통과했는데도 문제가 되느냐고 호소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위반이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새벽이든 아니든, 사람이 있든 없든, 위반해 놓고 왜 말이 많으냐”는 논리였다. 망연자실, 환장할 노릇이다.

유학 시절이다. 대학 주차장은 태평양처럼 넓었지만 차들이 많아 주차공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빙빙 돌다가 용케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찾았다. 하지만 주차구역은 아니었다.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주차가 가능할 것”이라며 엄지척. 그러나 며칠 뒤 대학당국으로부터 20달러 벌금고지서가 날아왔다.

엽서에 안내된 메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공간에 주차했는데도 문제가 되느냐”며 재고를 요청했다. 답이 왔다. “주차규정 위반이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공간임이 확인되어 벌금은 면제한다”고 알려 왔다. 답편지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행정이란 무엇인가?

뉴욕을 여행하다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행자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뉴욕에서 신호를 지키는 사람은 관광객뿐이라는 말까지 있다.

밀려드는 자동차 물결 속에서 거침없이 건너는 뉴요커를 제이워커 (jaywalker) 라고 한다. 경찰이 있어도 상관없다. 특히 일방통행 도로에서는 법 적용을 유연하게 해 안전하게 건너가는 것을 도와줄 뿐 스티커를 발부하는 경우는 드물다. 합리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2020년 한국은 어느 선진국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좋아졌다. 줄서기가 생활화되고 차로가 줄어들면 좌우 한대씩 차례로 진입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느 순간 국산품부터 찾게 되었다. 실제로 나가보면 나라밖이 오히려 불편하고 답답하고 촌스럽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일류국가로 자리를 굳힌 게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만 있는 것들이 있다. 불합리한 행정이다. 특히 막무가내식 교통행정의 후진성은 보통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이래 과속운전 단속 건수가 40% 이상 폭증했다고 뉴스는 전한다. 교통 과태료·범칙금도 급증해 올해 사상 처음 9000억원을 돌파한다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교통딱지로 부족한 세수(稅收)메우기에 나섰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809만건이던 과속단속 건수가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2017년 1184만건으로 크게 늘었다. 불과 일년 만에 46.3%가량 늘어난 것이다. 이후에도 2018년 1215만건, 2019년 1240만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외(稅外)수입인 과태료·범칙금 부과액도 크게 뛰었다. 16년 과태료·범칙금은 7915억원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17년 8857억원, 18년 8429억원, 19년 8862억원으로 급증했다.

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스티커 발부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예를 든 인적이 없는 이른 새벽시간의 스티커 발부를 두고 합리적인 행정이라고 하긴 어렵다. 합리성(rationality)은 어떤 행위가 궁극적 목표 달성의 최적수단이 되느냐의 여부를 가리는 개념이다. 합리성이 배제된 행정은 폭력이다. 세수가 부족하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메꾸면 좋겠다. 치(治)하기 위해 존재하는 관(官)은 반드시 망한다.

김동률 서강대교수 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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