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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돌비석 주워 신고하니 보상금 5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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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09년 포항의 한 주민이 도로공사장에서 화분 받침대로 쓰려고 주웠던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신라 정치체제의 급변을 알려주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주민은 이를 신고해 5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보의 자취-48] 2009년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의 한 주민이 도로 개설 공사장에서 넓적한 돌덩이 하나를 주워 집에 옮겨다 놓았다. 주민은 화분 받침대로 쓸 요량으로 돌을 세척하던 중 표면에 글씨가 새겨진 것을 눈여겨봤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주민은 포항시에 이 같은 사실을 신고했다. 비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로 판명 난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다.

화강암에 총 203자가 새겨져 있었다. 501년(지증왕 2) 흥해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을 신라 왕경 귀족이 개입해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신라 관등제 성립 과정, 지방 통치 양상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8년, 1989년 각각 발견된 울진 봉평리비(국보 제242호), 포항 냉수리비(국보 제264호)와 함께 신라에서 금관·대형왕릉으로 왕의 권위를 세우던 마립간 시대가 저물고 법과 제도로 통치되는 새로운 체제가 구축됐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주민 본인이 "로또 당첨된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행운도 따랐다. 그는 신고 덕에 5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지면서 불법적인 도굴, 유통, 국외 반출을 막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보상 및 포상' 조항을 둔 이래 지급된 문화재 보상금 중 최고액이었다. 보상금 산정위원회는 유물의 가치를 1억원으로 책정하고 그 금액의 50%를 보상금으로 발견자에게 줬던 것이다.

매장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다. 따라서 발견 후 15일 이내에 해당 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았을 때는 은닉죄가 적용돼 처벌받게 된다. 자신 소유의 땅에서 우연히 매장 문화재를 발견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은 "매장 문화재 발견 시 현상 변경 없이(원상태 그대로)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신 법은 문화재 발견자 또는 습득자, 토지 또는 건물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보상금 규모는 '유실물법'에서 설정하고 있으며 "매장물 가액의 절반을 국고에서 줘야 한다"고 명시한다.

2009년 2월에도 수도검침원이 경주시 동부동 주택의 수도를 검침하다가 수돗가 시멘트에 묻혀 있는 돌덩어리를 찾아냈다. 검침원은 돌덩어리의 돌출된 부분에서 글자 모양을 알아보고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알렸다. 현장조사 결과 돌덩어리는 잃어버린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비석 상단부로 판명 났다. 비석 하단부는 앞서 1961년 동부동 주택의 수돗가에서 100m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수습해 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문무왕비는 문무왕이 죽은 직후인 682년 지금의 경주 사천왕사 터(경주시 배반동)에 있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 후 최초로 건립했으며 사찰이 위치한 낭산에서 문무왕이 화장돼 비석을 이곳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비가 발견된 주택가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자리로 200년 전 추사 김정희가 사천왕사 터에서 비석을 발굴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러다가 다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가 민가로 변했고, 비석도 주택가에 방치된 것으로 짐작된다. 문무왕비에는 청나라 학자 유연정이 한국의 금석문을 모아 발간한 책 '해동금석원'에 기록된 것처럼 태종무열왕의 업적, 백제를 멸망시킨 과정, 문무왕이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 등이 적혀 있다. 비석의 가치는 6000만원으로 평가됐고 비석을 발견한 수도검침원과 집주인은 각각 1500만의 보상금을 수령했다.

최초 발견으로 인해 다른 유물까지 출토·인양되면 그에 상응하는 포상금을 더 받을 수 있다. 2007년 5월 충남 태안에서 주꾸미 잡이를 하던 어민의 그물에 고려청자 대접을 휘감은 주꾸미 한 마리가 걸렸다. 어민은 4일 뒤 태안군청에 청자 인양 사실을 신고했다. 이를 계기로 고려청자 등 2만5000여 점의 유물을 실은 고려시대 선박인 '태안보물선'을 발굴하게 된다. 수중 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주꾸미가 낚은 보물선'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태안선 유물 중 청자 퇴화문 두꺼비 모양 벼루가 보물 1783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등에 의해 이 어민이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어이없게도 그가 직접 건져올린 청자대접 1점 평가액 12만원의 절반인 6만원에 불과하다. 어민이 없었다면 태안보물선은 영원히 바닷속에서 잠자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같은 불합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령에서 보상금과는 별도로 포상금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다. 문화재 평가액이 1억원 이상(1등급)인 경우 '2000만원+(문화재 평가액-1억원)×(5/100)'의 공식을 적용해 포상금을 계산한다. 태안선과 유물의 가치는 1억원을 평가받아 어민은 2000만원의 포상금과 6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포상금 상한선이 2000만원이라는 조항의 적용을 받았다. 또다시 어민의 기여도에 비해 포상금이 너무 적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곧바로 시행령을 개정해 금액을 1억원까지 받을 수 있도록 바꿨다.

이어 2007년 7월 태안 마도 인근에서도 어부가 청자를 인양했다고 신고함에 따라 발굴작업이 시작돼 2009년부터 마도 1·2·3호 등 난파선 3척과 고려청자, 묵간, 죽찰 등 다량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 어부에게는 보상금 10만원, 포상금 3384만원 등 총 3394만원이 나왔다. 마도 유물 중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이 각각 보물 제1783호, 보물 제1784호로 지정됐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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