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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족보 없으니 ‘양반’ 아니지만 ‘90% 한국인’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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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메리놀외방전교회 함제도 신부

한겨레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메리놀회 원로 선교사 ‘제라드 해먼드’는 60년 전 잊혀진 이름이 됐다. 1960년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샌프란시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땅에 발을 내디디면서 그는 한국 이름 ‘함제도’(87) 신부로 거듭났다. 그의 서품 60돌을 맞아 <선교사의 여행>이 출간됐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주관해 함 신부의 구술을 받아 이향규·고민정·김혜인 등 3명이 기록을 정리했다. 13일 오전 11시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그의 사제수품 60돌 감사미사가 봉헌된다.

사제 수품 60돌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연 함 신부를 12일 서울 영등포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에 있는 그의 처소에서 만났다. 한국 나이로 미수를 가리키는 ‘팔팔 할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우스개까지 섞어가며 유창한 우리말로 ‘한국에서 60년’을 회고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제라드 해먼드’

1960년 청주 변두리 성심고아원에

‘청주 함씨’ 개명하고 30여년 봉사

“남북 열려 평양에서 여생 보내고파”


13일 파주 ‘사제수품 60돌’ 감사미사

‘선교사의 여행’ 구술회고록도 펴내


함 신부에게는 그가 태어난 미국 필라델피아 말고, ‘제2의 고향’이 2곳이나 있다. 하나는 그가 현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간 봉사한 청주교구이고, 또 다른 곳은 여건이 되면 여생을 보내기를 바랐던 북녘땅이다.

“청주 한씨란 양반 성씨와 달리 청주 함씨는 족보가 없어요. 족보가 없으면 양반이 될 수 없죠.”

청주가 ‘맴(마음)의 고향’이라는 그는 천진스런 유머로 청주사랑을 표현했다. 그가 속한 메리놀회외방선교회는 1923년부터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남북 교류 활성화로 평양메리놀회가 복원되면 평양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었다는 그는 최근들어 그 기원이 멀어져 보이자 생을 마치면 청주교구에 뼈를 묻기로 했다.

그가 처음 건너왔을 때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가 처음 맡았던 청주 변두리의 성심고아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먹을 것이 절대 부족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사들조차 외부의 과수원에서 일을 해야 했고, 그 역시 청주대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한 푼이라도 보태야 했다. 그 뒤 성당에 나가 만난 신자들의 상황은 더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장례미사를 위해 묘지에 갔을 때, 서른살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아이 서넛이나 딸린 젊은 여성이 ‘신부님,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요’ 하는데도, 도울 방법이 없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런데도 나중에 보면, 이웃들이 그런 불우한 이들에게 관심과 도움을 준 덕분에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그렇게 다들 가난했지만 그 힘든 세월을 함께 견뎌냈다. 대문을 잠그지 않아 낯선 이들도 편히 들어올 수 있게 했고, 너나없이 배가 고픈 걸 아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라고 먼저 묻고, 청하지 않았더라도, 자리가 없더라도 기꺼이 함께 식사를 했다. 한국에 와서 배운 것은 그렇게 함께 나누며 사는 정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인내심이었다. 한국인들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민족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 한국인들이 그런 장점을 세계에 널리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가 가톨릭 신자인지 개신교 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원래 한국인들처럼 양심을 갖고 갖고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전통적인 한국인들이 모습이 너무나 좋아서 자주 한복을 입고,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면서 “아직도 100%는 못 되고, 80~90%는 한국인인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의 한국 사랑은 ‘못 하는 게 없는, 불가능이 없는 사람들’이란 ‘한국인 찬사’로 이어졌다.

“1960년대엔 청주에서 서울에 오는 길도 비포장도로여서 트럭의 타이어가 ‘빵구’ 나기 쉽상이었다. 그러면 한국인은 차에서 내려 툭탁툭탁 하면서 어떻게든 고쳐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자신은 그때부터 한국인들이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가 만난 첫 한국인은 최근 선종한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다. 고교과정인 미국의 소신학교 동창인 장 주교의 선종 직전에도 함께 했다는 그는 “우린 친구가 아니라 형제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만남에서 “내가 3개월 빠르니 ‘형님’하고 부르라고 해서 ‘오냐’ 하고 대답했다”며 생사의 고비에서도 잊지 않았던 유머를 전했다. 그는 “장 주교가 한국인에게 가장 무서운 현상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동의한다”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한국인들이 분열을 딛고 함께 할 때 무한한 가능성을 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진벨재단을 통해 60여차례 방북해 북한 돕기에도 앞장 섰던 그는 “북에서 봤을 때 나는 미국 여권을 가진 원수이자 가톨릭 신부이고 늙은 선교사 아니냐”면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는 제 나라 이익만 챙기겠지만 5천년을 함께 해온 남북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접촉하면 할수록 동질성을 회복할 수 밖에 없다”며 상호 평화와 대화를 기원했다. 그는 “예수님은 가장 아픔이 있는 곳에 계신다”면서 “그것이 우리가 북한에 가고 도와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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