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8월 31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가수 페이루즈의 자택을 찾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페이루즈 트위터(@FayrouzOffici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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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초대형 사고까지 겹쳤는데 정치권은 갈라져 있고 경제는 무너진 레바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 나라를 찾아 개혁과 단합을 호소했다. 이대로 분열과 불안이 계속되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침몰할 것이라 경고했다. 과거 위임통치를 했던 역사 때문에 레바논에 여전히 지분이 있다고 믿는 프랑스의 대통령이, 레바논 정치권을 상대로 경고메시지를 내놓기 전에 먼저 만난 사람이 있다. 레바논을 넘어 ‘아랍의 목소리’로 불리는 가수 페이루즈다.
데일리스타,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레바논 정치권을 향해 심도 깊은 개혁을 석 달 안에 단행하지 않으면 원조금을 내줄 수 없다고 경고했다. 프랑스는 지난달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항구 폭발 대참사가 일어난 뒤 국제지원그룹(CEDRE)을 만들어 레바논 지원을 추진해왔다.
레바논에서는 200명 가까운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사 뒤 내각이 총사퇴했고 지난달 31일 무스타파 아디브 독일 주재 대사가 새 총리로 지명됐다. 하지만 고질적인 종파주의 때문에 국제사회의 지원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지는 미지수다.
레바논은 종교적으로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마론파 기독교와 정교 등이 공존하고 있는 나라다. 2005년 ‘백향목 혁명’ 이후 이 나라는 권력분점을 제도화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가, 실질적인 정부 지도자인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가,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맡는다. 종파 간 분열이 유혈사태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런 식의 권력분점은 결국 종파별 권력 나눠먹기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항구 폭발 직후 마크롱 대통령이 베이루트를 방문하자 시내에서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정부에 지원금을 주지 말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군 지원팀으로부터 항구 폭발 참사 뒤 복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베이루트 |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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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은 지난해부터 인플레와 전력부족 등으로 고통을 겪어왔다. 올해 코로나19 때문에 경제난이 극도로 심해지자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구제금융을 받기로 결정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상을 해왔다. IMF는 새 총리가 지명되자 내각 출범과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레바논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총리로 지명된 48세의 아디브는 외교관, 변호사, 정치인, 학자의 여러 경력을 갖고 있고 사아드 하리리 전 총리가 이끄는 주요 정당 타야르 알무스타크발(미래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 사이에 그의 인지도는 낮다. 아버지에 이어 총리를 지낸 하리리가 정치력이 검증되지 않은 아디브를 내세운 뒤 정국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의심도 나온다.
마크롱 대통령은 새 총리가 지명된 직후 베이루트행 비행기 안에서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레바논의 각 정파가 정치개혁 스케줄을 만들고 ‘6개월에서 12개월 안에’ 총선을 치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1일에는 폭발 현장을 둘러보고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촉구했다. 10월에 국제회의를 열어 레바논 지원을 논의할 계획이지만, 레바논 측이 전력산업과 은행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CEDRE의 자금을 풀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베이루트 도심의 순교자 광장에는 이날도 시민 수백명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한달 새 두 번째 레바논을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의 행보에서 개혁 촉구 메시지와 함께 눈길을 끈 것은 페이루즈와의 만남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베이루트에 도착하자마자 근교 라비에에 있는 페이루즈의 자택을 찾아가 85세 노(老) 가수를 만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마스크 없이 고령인 페이루즈와 대화를 나눴으며 페이루즈는 코로나19 감염 위험 때문에 플라스틱 투명 얼굴가리개를 썼다. 마크롱 대통령은 페이루즈와의 저녁식사 뒤 “그는 우리가 사랑하고 기대하는 레바논,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 레바논 그 자체이며 너무나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본명이 누하드 와디 하다드인 페이루즈는 레바논의 ‘국민 여가수’이기도 하지만, 레바논을 넘어 아랍권 전체가 사랑했던 가수였다. 현지 언론들의 표현을 빌면 ‘프랑스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차지하는 위치, 미국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비교되는 인물이다.
페이루즈는 10대 시절인 1940년대 라디오방송국에서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시작했고 1952년 ‘이타브’라는 노래를 히트시켜 아랍의 스타로 떠올랐다. 1950~60년대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모로코, 튀니지까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그의 노래는 어수선한 시대 아랍의 시름을 달랬다.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둘 나세르의 ‘범아랍주의’가 호소력을 갖던 시기와도 맞물렸다.
2002년 8월 레바논 가수 페이루즈가 휴양도시 베이테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AP자료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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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루즈가 지금까지 녹음한 곡은 1500곡이 넘는다. 80여장의 앨범은 세계에서 1억5000만장이 팔렸다. 페이루즈는 레바논의 우표에 등장했고,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상을 받았고, 요르단 국왕의 메달을 받았다. 명성은 아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런던의 앨버트홀, 뉴욕의 링컨센터와 유엔총회장, 파리 올랭피아홀과 암스테르담의 왕립극장에서 그의 공연이 올렸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페이루즈에게 예술훈장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메시지에도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1969년 페이루즈는 알제리 독재자 우아리 부메디엔을 위한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했고 반년 동안 그의 노래들은 레바논 내에서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80년대 내전 기간에는 공연을 중단했으나 그의 노래들은 나라 안팎에서 오히려 더 인기를 끌었다.
다시 논란이 일어난 것은 2013년이었다. 레바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무장정치세력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의 적대관계로 유명하다. 2006년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이스라엘의 공격을 물리쳐 아랍권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아랍국 정부들이나 미국은 헤즈볼라를 미워하고, 테러조직이라며 제재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2013년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을 돕기 위해 전투원을 파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리아인들의 대척점에 섰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레바논 정치권에 개혁을 촉구한 1일, 베이루스 시내에서는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베이루트 |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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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말 페이루즈의 아들 지아드 라바니는 레바논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비판론과 옹호론이 함께 일었다. 하지만 정치권의 분열을 원로 가수에게 떠넘겨서는 안 되며, 페이루즈를 특정한 정치적 견해와 연결지어서는 안 된다는 옹호론이 더 컸다. 소수종파 드루즈파 정치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는 “페이루즈는 비판을 받기엔 너무 위대하며 어느 정치진영으로 분류되거나 연결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페이루즈를 ‘헤즈볼라 편’으로 못박는 것은 여러 정치세력 모두에게 극도로 부담스럽고 불리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이후에도 페이루즈는 레바논에서 ‘단합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베이루트’는 최근 전염병과 사고에 강타당한 베이루트 시민들의 벗으로 다시 떠올랐다. 소셜미디어에서 이 노래가 회자되고, 참사의 아픔을 담은 화면에 이 노래를 입힌 동영상이 돌고 있다. 9년 째 공식 석상에 나온 일이 없는 그를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찾아간 것은, 레바논 국민들에게 단합을 호소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싣기 위해서라고 걸프뉴스 등 아랍 언론들은 분석했다. 레바논 지원을 계기로 중동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싶어하는 마크롱 대통령은 베이루트 방문 뒤 2일 이라크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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