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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8개월 잠입, n번방 세상에 알린 2인의 女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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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 최초 폭로한 20代 ‘추적단 불꽃’… 탐사취재기 책으로 내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사는 이들이 벌이는 짓인가?’

지난해 7월 두 명의 여대생이 여성들을 불법 촬영한 영상이 공유된다는 텔레그램 대화방 ‘n번방’의 1번방에 접속했다. 기자를 꿈꾸던 이들은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불법 촬영’을 주제로 탐사 보도 공모전을 준비 중이었다. 긴 잠복 끝에 마침내 n번방에 입장했을 때 눈앞에 초·중생 여자아이들의 나체가 펼쳐졌다. 자위하는 건 기본이고 칼로 몸에 ‘노예’라고 새기거나, 야외를 활보하기도 했다. ‘갓갓’이란 닉네임을 가진 자가 공지를 올렸다. “여기 공유되는 영상과 사진들은 ‘일탈계’(청소년들이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소셜미디어 계정) 하는 여자아이들을 협박해 얻어낸 자료들입니다. 마음대로 유포하셔도 됩니다.”

조선일보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n번방 사건' 최초 고발자이자 보도자인 '추적단 불꽃'이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며 디지털 성범죄 증거를 모으고 있다. 이들은“손 안의 화면 안에서 동시대 여성이 끔찍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당장 도와줄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 가장 슬펐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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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치밀고 속이 울렁거렸다. 가해자와 피해자, 성 착취물이 실시간으로 눈앞을 지나갔다. “그냥 지나친다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방관자가 되는 거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그 방에서 빼내주고 싶었다.” 지난 3월 대한민국을 경악시킨 ‘n번방 사건’ 보도의 시작이었다.

한국 사회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폭로한 ‘추적단 불꽃(이하 불꽃)’을 22일 만났다. 20대 중반 여성인 이들은 대학 선후배 사이.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공개하지 않는 이들은 ‘단’과 ‘불’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n번방 추적기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이봄)가 24일 출간된다.

불꽃이 제출한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본 경찰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찰과 불꽃의 협업이 시작됐다. 불꽃은 n번방에 잠복하며 ‘와치맨’ ‘박사’ ‘갓갓’ 같은 핵심 운영자들이 신상을 특정할 만한 이야기를 남길 때마다 캡처해 경찰에 넘겼다. 낮에는 취업을 준비하고, 밤에는 새벽까지 n번방에 접속해 있었다.

취재가 진행될수록 정신적 스트레스도 커졌다. 취재기가 공모에서 입상해 실명이 적힌 기사가 n번방에 공유됐을 때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힘이 셌다. n번방에서 ‘지인 능욕’이라며 아는 여자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해 희롱하며 신상을 공개하는 일이 유행했다. 불꽃은 피해자를 찾아내 이 사실을 알렸다. 피해자들도 적극 협조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은 인스타그램 사진 정보 공개 설정 범위를 좁혀가다 친구 중 한 명만 볼 수 있도록 설정한 사진이 n번방에 올라왔을 때, 중학교 동창인 ‘그놈’을 경찰에 신고했다. 학생들이 여교사를 능욕하며 즐기는 ‘선생님방’ 피해자를 찾을 땐 교사 지인을 총동원했다. ‘불’은 “엄마가 교사라 분노가 더 컸다”고 했다.

불꽃의 추격전은 지난 3월 ‘박사’ 조주빈이 취재 8개월 만에 경찰에게 붙잡히고, 5월 ‘갓갓’ 문형욱이 검거되며 정점에 올랐다. 불꽃은 “기분이 진짜 좋았지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고 했다. “몇 백, 몇 만 명으로 불어난 가해자가 여전히 활동 중이란 사실이 씁쓸했어요.”

법원과 검찰의 ‘솜방망이 처벌’에도 절망했다. n번방에서 아동 성 착취물 공유를 일삼던 ‘켈리’가 붙잡혔을 때, 경찰 수사에 협조하고 범행을 자백한 점이 감안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분노한 불꽃은 그의 범죄 행각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고, 검찰은 결국 켈리를 추가 기소했다. 불꽃은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 가해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n번방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먹고 자란 것”이라고 했다.

요즘 ‘불꽃’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에 대한 강연에 힘을 쏟고 있다. 새로운 디지털 범죄 취재도 시작했다. 경찰 외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건, 그렇지만 둘이라 힘이 되었다고 했다. “저 아이가 이만큼 일해서 이만큼의 사람을 도왔다면 나도 그만큼 해서 도와야겠다 생각했죠. 그렇게 1년간 함께 성장했어요.” 독일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악(惡)의 평범성을 말했지만. 이들은 선(善)이 평범하다 여긴다. 세간은 이들을 ‘전사(戰士)’라 부르지만 이들은 “평범한 취준생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가 n번방을 추적한 것처럼, 다른 분들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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