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2 (일)

공화·민주의 ‘눈독’에도 호락호락 않은 미 대법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3일 “(선거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봐야 한다”며, 선거에 지면 ‘평화적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약속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이번 선거에서 부쩍 비율이 높아질 우편투표의 “사기성”을 거듭 강조했다. 트럼프는 또 “선거 결과가 법원에서 결정될 것이므로, 선거 전에 (사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의 공백을 메워) 9명의 대법관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조선일보

23일 저녁, 시민들의 애도 속에 미 대법원 건물 전면에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연방 대법관의 관이 안치돼 있다. 같은날 트럼프 대통령은 패배시 평화적 정권 이양 약속을 거부하고, "선거 전에 공백을 메워, 9명의 대법관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UPI 연합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트럼프, 법원의 보수성 강화해 소송 대비 목적

현재 미국에선 65세 이상으로 한정한 부재자 투표용지 발송(텍사스), 우체국 소인(消印)이 찍히지 않은 우편 투표용지의 집계(네바다), 벌금을 완납하지 않은 범죄자의 투표권 몰수(플로리다) 등을 놓고 곳곳에서 선거 관련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선거 후에는, 우편·현장 투표의 투·개표 과정을 놓고 줄소송이 벌어질 게 뻔하다.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먼저 이 모든 것의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것이고, 최종 판결을 내릴 대법원의 보수 성향을 강화(현재 5명→6명)하기 위해 후임 대법관을 속히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집권 후, 대법관 수 늘리자”

반대로 민주당 내에선 대선과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 모두 이기고, 법률을 개정해 대법관 수를 늘려(court packing), 트럼프가 구축한 대법원을 ‘물타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상원 민주당 대표인 찰스 슈머는 최근 민주당 의원들과의 전화 콘퍼런스에서 “(대법원 구성에 대해) 어떤 방안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주당 대선 경선 때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은 “단순히 확대하자는 게 아니라, 대법원에서 정치색을 빼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11명의 경선주자가 ‘물타기’에 동조했다. 미 연방 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사임이나 탄핵이 아니면 교체가 힘들다.

◇고무줄처럼 변했던 연방대법관 정원(定員)

최초 6명으로 출발한 미 연방대법관 수는 1863년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시절엔 10명까지 됐지만, 수년 뒤 다시 7명으로 줄었다. 의회가 후임인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을 막기 위해 정원을 줄였다. 지금의 9명은 150년 전인 1869년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18대) 때부터 정착됐다.

이후에도 프랭클린 루스벨트(FDR) 대통령은 자신의 뉴딜 정책 법안들이 대법원의 계속적인 위헌(違憲) 판결로 제동이 걸리자, 70세 이상의 연방 판사에 대해 한 명씩 추가 임명하는 ‘사법개혁안’을 냈다.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연방대법원에 5~6명을 ‘민주당 성향’으로 더 앉히려는 것이었다. 이 사태는 1937년 대법원이 자체적으로 ‘시대 변화’를 읽고 대법관 2명이 입장을 바꾸면서 해결됐다. ‘정원 9명과 대법원의 독립성을 구해낸 전환’이란 말이 나왔다.

◇바이든은 전통과 관행 중시하는 ‘제도주의자’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은 기본적으로 대법관 수 확대에는 반대한다. 30여년 연방 의회 생활을 한 그는 전형적인 ‘제도주의자’다. 그는 “집권하면 대법관 수를 늘려 우리가 얻은 표를 제대로 반영하겠다는 생각이야말로 법원을 정파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대법관 정원의 확대·축소는 남북전쟁 이후 재건(再建) 시절에나 어울렸지, 그런 결정을 하면 살면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숨진 긴즈버그 대법관도 정원 변경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만약 바이든이 집권하고서도, 공화당이 그의 좌파 정책에 대해 계속 위헌 소송을 제기하고 결국 ‘보수적인’ 대법원이 끝내 좌절시킨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FDR처럼 대법관 확대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는 미 대법원

그러나 보수 성향이 강한 지금의 미 연방대법원이 선거 소송과 정파 간 이해가 첨예하게 맞서는 이슈들에서 한쪽에 치우친 판결을 계속 내려, 현(現) 상황에 불을 불일지는 불분명하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성향이지만, 사법부의 합법성과 독립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다니엘 퍼실리 스탠퍼드대 법대 교수는 21일 뉴욕타임스에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정파(政派)를 따르거나 긴즈버그의 죽음을 악용한다고 비치는 순간, 바로 대법원의 권위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걸 잘 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 대법원은 공화·민주당이 상충하는 우편투표 규칙의 완화를 둘러싼 소송들에서도, 경우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렸다.

조선일보

존 로버츠 미 연방 대법원장이 23일 대법원에서 있었던 긴즈버그 대법관의 장례 의식을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EPA 연합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23일 “미 연방 대법관들 스스로 여론이나 시대 흐름과 너무 다른 입장을 고수하면, 법원의 독립성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걸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밝혔다. 과거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나 앤서니 케네디, 데이비드 수터 등의 대법관이 이후 공화당 정부를 실망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로버츠 대법원장도 2012년 빈곤층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한 ‘오바마케어’를 구하는데 일조했다. 미국인의 일반적인 여론이 오바마케어의 폐지보다는, 점진적인 확대를 원하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FT는 “미 연방대법관들은 대법원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만, 판결이 여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진단했다.

[이철민 선임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