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김정은의 전통문에는 희생된 우리 국민에 대한 진정한 사과 의지가 담겨 있지 않다. 북한은 총격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비상방역 규정을 내세워 마치 잘못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드러냈다. 북한은 또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만 태웠다고 주장했다. 시신을 불태웠다는 우리 군의 발표를 부인한 것이어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전통문을 공개하면서 남북 정상이 이달 초 친서를 주고받았다며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거론했다. 특히 서 실장은 “전통문에 사태 발생 경위에 대한 북측 설명, 우리 국민에 대한 사과와 유감 표명, 재발 방지 내용 등을 담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와대가 북한이 해야 할 조치들이 마치 전통문 한 장으로 상당 부분 이뤄진 것처럼 몰고 가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북한의 전통문이 공개되기 전에 이뤄진 제72회 국군의 날 기념식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만 했을 뿐 북한의 만행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국군통수권자로서 취할 태도라 하기 어렵다.
정부 여당의 발언이나 인식에는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하기 힘든 왜곡된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청와대는 9·19남북군사합의 세부 항목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했고, 군은 적대행위에는 소(小)화기가 아니라 포격만 해당된다고 미세한 자구 분석에 매달렸다. 육해공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는 합의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북한이 사과하면 의외로 남북관계도 좋아질 수 있는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북한이 만행을 저질러도 북한 눈치를 보는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김정은의 어설픈 유감 표명으로 책임 추궁을 대충 덮고 가려 한다면 국민이 용납지 않을 것이며, 안보는 물론이고 남북관계의 진정한 정상화에도 씻지 못할 해악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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