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세상을 바꾸자” 거리로 나온 세계 여성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26년째 독재를 이어온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 맞서 수천명의 여성들이 지난 9월 19일(현지시간) 수도 민스크 도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위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26년째 독재를 이어온 벨라루스 대통령에 맞서 수천명의 여성들이 9월 19일(현지시간) 수도 민스크 도심에 모였다. 8월 9일 대선 이후 6주째 이어진 ‘여성들의 행진’은 반정부 시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정부는 시위대를 납치해 추방하거나 감금·고문하고 있지만, 여성들의 함성은 더 커지고 있다.

지구촌 여성들이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벨라루스뿐만 아니라 레바논, 멕시코 등에서 독재, 경제위기, 범죄에 맞서 세계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 맞서는 반정부 시위의 상징은 ‘여성’이다. ‘여성파워’의 태동엔 남편을 대신해 대권에 나서 정치 돌풍을 일으킨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를 비롯한 ‘여전사 3인방’이 있다. 티하놉스카야처럼 유력 야권 정치인이었던 남편을 대신해 정치에 나선 베로니카 체프칼로, 그리고 야권 선거캠프 활동가였던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그 주인공이다. 국민은 대선에서 개표 과정 조작이 있었다며 대선 득표율 2위를 기록한 티하놉스카야가 실제로 승리를 거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기의 나라를 바꾸자” 레바논의 여성들

루카셴코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여성들은 약해빠졌다”라며 이들을 가리켜 “불쌍한 세 소녀”라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세 사람의 협업은 26년 동안 정권을 놓지 않는 독재자를 위협하는 ‘여성파워’의 토대를 마련했다. 콜레스니코바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내가 독재자에 정면으로 맞서자 많은 여성이 영감을 얻었다”면서 “벨라루스의 여성들은 부엌에서 나와 남성들과 함께, 때로는 남성들보다 앞서서 정치적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신변 위협으로 콜레스니코바와 체프칼로는 해외로 피신했고, 콜레스니코바는 국가전복 선동죄로 기소돼 수감된 상태다. 반정부 시위의 구심점이 사라졌지만 여성들의 연대는 느슨해지지 않았다. 19일 시위에서 여성들은 벨라루스 옛 국기를 들고 “독재자는 감옥으로!”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경찰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수백명을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무력을 사용했다. 여성들은 “겁쟁이들만 여자를 때린다” 외치며 저항했다. 티하놉스카야는 리투아니아에서 “벨라루스의 용감한 여성들이 끊임없이 협박과 위협을 받으면서도 행진을 하고 있다”며 여성 시위대를 독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

9월 19일(현지시간) 26년째 독재를 이어온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 맞서 수도 민스크 도심에 모여 시위를 벌이던 여성을 경찰이 끌고 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4일 초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난 레바논에서도 위기를 초래한 사회 시스템을 바꾸자며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도 베이루트 항구의 창고에 6년간 방치되다시피 보관돼 있던 다량의 질산암모늄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정부에 분노한 시민은 거리로 나왔다. 이미 끔찍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터라 국민의 분노는 더 커졌다.

지난 9월 12일 베이루트 순교자 광장에서는 어김없이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손을 잡고 인간띠를 형성해 경찰과 대치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고 독일 일간 도이체벨레의 베이루트 통신원 시나 슈바이클은 전했다. 지난해 10월 17일 시위가 시작된 이후 거의 모든 시위에 참여했다는 라일라 자헤드(60)는 “여성들은 총을 발사할 준비가 된 군인과 성난 시위대 사이에 서서 폭력을 막았다”고 슈바이클에 말했다.

여성들은 시위뿐만 아니라 폭발사고 구조 작업에도 나섰다. 사고 약 4주 후인 지난 2일 칠레구조대는 폭발로 무너진 주택 잔해에서 맥박으로 추정되는 생존 신호를 발견했다. 도시 전체가 기적을 기원했다. 수색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크레인이 필요했다. 군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작전을 중단했다. 그때 여성 활동가 멜리사 파탈라(42)가 “크레인을 가져오겠다”고 외쳤다. 그는 다른 활동가와 함께 크레인을 구해왔고, 구조 작업은 지체하지 않고 계속됐다. 생존자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구조 현장에서 무기력한 군을 상대로 바쁘게 움직이는 건 여성들과 시민이었다.

국가인권위 건물 점거한 멕시코 여성들

레바논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일러스트 작가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신시아 마리아 아라모니(31)는 최근 미국에서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부패한 정치, 종파적 사회 구조를 바꾸자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아라모니는 “그동안 남자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강요했지만, 여성들은 이제 레바논을 위해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을 폭력 피해 여성들의 쉼터로 만들겠다.” 지난 9월 2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도심의 국가인권위원회(CNDH) 건물은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쓴 여성들에 점거당했다. 페미사이드(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 가족들과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었다. 최근 몇 달 사이 여성을 겨냥한 범죄가 급증하는데도 정부는 가해자 엄벌은커녕 피해여성 지원예산을 삭감했다. 이에 분노한 피해자 가족들이 페미니스트 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직접 피해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경향신문

9월 2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도심의 국가인권위원회(CNDH) 건물을 페미사이드(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 가족들과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 점거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은 “멕시코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 대상 범죄를 부추긴다”면서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 등 CNDH 사무실에 걸려 있던 남성 위인들의 초상화를 훼손했다. 건물 벽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겠다”, “정의” 등의 문구를 적었다. 시민은 생필품을 지원하는 등 이들을 격려하고 있지만 정부 반응은 냉담하다. 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지난 7일 “모든 시위를 존중하지만 폭력과 반달리즘엔 동의하지 않는다”며 시위대를 비판했다. 이들이 우파와 결탁해 자신의 정권을 위협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반응에 분노하고 있다. 한 활동가는 멕시코데일리뉴스에 “취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여성의 편에 서겠다던 대통령이 이제 여성부 예산을 삭감하고, 우리를 정치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격분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CNDH 앞에서 시위대는 오늘도 이렇게 외치고 있다. “국민 인권을 무시하는 인권위원회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부에 닿지 않을 것입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