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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강준만 칼럼] ‘코로나 시대’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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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 다채널 시대엔 “정치적 편향성은 이익이 되는 장사”라는 속설이 있다. 그건 멀리 내다보면 스스로 언론의 권위를 말살하는 ‘제 살 깎아먹기’, 아니 ‘제 무덤 파기’다. 언론 행위의 기술적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 상황에서 급증하고 있는, 정치적 편향성을 종교적 신앙으로 삼은 ‘1인 선동가’들과 경쟁해보겠다니, 이런 자해 행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겨레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4월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세계는 이전과 절대로 같아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가고 과거의 성곽도시(walled city)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키신저 이외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각국이 국경을 강화하고 무역과 시민들의 이동을 제한한 조치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화 시대’의 쇠퇴, ‘보호무역 시대’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코로나 이후에 전개될 세상의 달라질 모습에 미리 대비하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세대 정책실험실’을 표방하는 싱크탱크 랩(LAB)2050이 각계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최근 출간한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파국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상상력>이란 책은 시의적절하다.

이 책에서 특히 다음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다. “내일을 보기보다는 내년을 봐야 하며, 1년 후보다는 10년 후를 보면서 우리의 삶과 이 사회를 재구조화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정부와 정치의 역할이 다른 시기보다 중요해진다”며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비전이다”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비전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가장 큰 힘을 쏟고 있는 건 당파 싸움이다. 물론 싸움을 벌이는 양측 모두 ‘당파 싸움’이란 표현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당파 싸움이 다 그런 정도의 명분은 갖고 있지 않았나?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이 그 어느 쪽도 완승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이다. 언론과 시민단체는 물론 다수 국민들마저 사실상 당파 싸움에 참전하고 있어 심판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싸움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비전도 모색하는 동시병행론이다. 현재의 당파 싸움은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데, 민생 위주의 비전을 모색하다 보면 그런 당파 싸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성찰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비전에 대한 논의는 언론의 몫이다. 우선 비전은 ‘뉴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의심해봐야 한다. ‘뉴스 상품성’이 높다는 싸움 보도와 논평에 치중해서 그간 얻은 게 뭔가? 언론이 편을 나눠 싸운 덕분에 언론신뢰도가 추락하다 못해 바닥을 치고 있지 않은가. 속된 말로, 이게 과연 ‘남는 장사’인가? 하루 이틀 장사하고 접을 건가? 멀리 내다보면 큰일 나나? 왜 그 좋은 머리로 ‘비전의 상품화’를 위해 애쓸 생각은 하지 않고, 싸움에만 집착해야 하는가? 언론을 ‘기레기’라고 부르는 몹쓸 욕설에 분노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게 분노할 수 있는 근거와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다매체 다채널 시대엔 “정치적 편향성은 이익이 되는 장사”라는 속설이 있다. 미국의 폭스뉴스가 이 전략으로 큰 재미를 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 언론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 전략을 추종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멀리 내다보면 스스로 언론의 권위를 말살하는 ‘제 살 깎아먹기’, 아니 ‘제 무덤 파기’다. 언론 행위의 기술적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 상황에서 급증하고 있는, 정치적 편향성을 종교적 신앙으로 삼은 ‘1인 선동가’들과 경쟁해보겠다니, 이런 자해 행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영방송은 정치적 편향성이 있는 일부 프로그램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편향성 판별법은 간단하다. 정권 바뀌어도 지금처럼 할 수 있겠는가? 보수에서 진보 또는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모진 시련과 고통을 겪고 나서도 아직도 느끼고 배운 게 없단 말인가? 모든 국민을 껴안는 비전 중심의 콘텐츠에 주력하면 좋겠다.

대다수 국민은 부동산 가격 폭등에 분노하고, 동일 노동에 큰 임금 격차를 두는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학교가 계급투쟁의 도구로 전락한 현실에 개탄하며, 그 어떤 차별 없이 창의와 혁신을 위한 경쟁이 왕성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이 문제들을 놓고 누가 더 좋은 비전과 아이디어를 제시하느냐 하는 경쟁을 해야 한다. 싸움을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은 국민적 신뢰가 있어야 완승을 거두는 싸움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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