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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김한민의 탈인간] 무증상-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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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한민 ㅣ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자본주의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웬만한 문제는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체제 변화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는 거의 없다. 상상력도 고갈됐다. “지구 종말보다 자본주의 종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젠 옛말, 현실 정치 너머의 상상조차 드물다. 불평등, 기후위기…. 문제가 넘쳐나도 래디컬한 변화라는 반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일 만큼 자극의 역치가 높아졌다.

체제 변화의 요인은 외세 개입, 대중적 열망, 쿠데타, 자연재해 등 다양하고 복합적이지만, 체제 불변에는 한 가지 확실한 요인이 있다. 강력한 기득권 세력의 존재다. 이것이 공고하면 혁명의 시도가 있어도 완수는 불가능하다. 역사적인 독재·과두체제의 잔상 탓에 우리 머릿속엔 극소수 지배층이 다수를 착취하는 구조가 낯익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슬로건 “우리는 99%”가 그런 상상력을 대표한다. 미국 재계를 장악한 1%의 특권층을 끌어내리면 변화가 오리라는 희망을 준 멋진 문구지만, 나머지 99%가 동질적이라는 오해를 낳기 쉽다. 금융판을 갈아엎고자 한 세력이 정말로 99%였다면 혁명은 일어났을 것이다.

돈깨나 버는 나라일수록 기득권층의 외연은 복잡다단하다. 기득권층 바로 아래서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거나, 노력하면 진입할 수 있다고 믿거나, 그들에게 기생하거나, ‘기득의 맛’을 본 계층….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기득권층은 상당히 두텁고, 최상위 1%를 무력화시킨들 즉각 그 자리를 꿰찰 태세를 갖췄다. 가령, 직업상의 기득권을 정규직으로 본다면 한국 임금노동자의 약 60%가 기득권층이다. 그들 중 일부라도 혜택을 양보할 생각이 있어야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주택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하면 자가 보유율이 약 60%인데,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는 자가 보유자의 약 10%가 기득권(집값 상승)을 포기하고 무주택자와 연대해야 집값이 잡힌다고 주장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까? 작은 기득권이라도 확보해 ‘잃을 게 있는’ 주류가 형성된 사회의 신기득권층은 급진적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세력으로 변하기 마련. “그 누구의 손해 감수 없이 파이를 키우면 된다”는 착각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이들 중 상당수가 희생을 자처한다면 그 자체로 혁명 아니 기적이리라.

사람이 된통 아파봐야 나쁜 습관까지 뜯어고칠 의지가 생기듯, 사회도 심하게 망가진 부분들이 곪아 터져야 변화의 동기가 추동되곤 한다. 다만, 자본 체제는 통증을 땜질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 역할을 바로 광의의 기득권층이 맡는다. 자본의 폐해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본-게임에 순응하는 플레이어들의 모범사례를 강조해 동경을 사고 체제 비판을 무력화시킨다. “보라! 저렇게 잘하는 이들도 있는데, 게임의 규칙을 바꾸자니?” 잘난 소수의 선전(善戰)과 성공 신화를 재생산하는 담론은 체제의 상처를 위로하는 척 약점을 감추며, 자본주의를 ‘적당히 고쳐 쓰면 여전히 쓸 만한 무엇’으로 둔갑시킨다. 그리하여 이성복의 시구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괴이한 세계는 지속되고, 위험 신호들은 엄살 혹은 일시적·부분적 오류로 축소된다.

온 세상이 신음하는 듯한 시기들에도 제법 살 만한 이들이 전체의 몇 %인지는 영영 ‘깜깜이’로 남으리라. 아이엠에프 때 ‘이대로!’라며 은밀히 축배를 들던, 코로나19에도 꼬박꼬박 돈 들어올 곳 있는 그들도 뜯어보면 아픈 구석이 없진 않겠지만, 눈에 띄는 증상은 없다. ‘발열’도, ‘기침’도, 반-자본주의자와의 접촉 기록도…. 하지만 역병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한다는 무증상 감염자도, 자본 너머의 상상을 초토화시킨 자본-바이러스 보균자의 전파력은 못 따라간다. 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정말로 알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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