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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성소수자, 길벗체처럼 명랑하게 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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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갯빛’ 응원 한글 폰트

인권운동 길버트 기려 개발

“드러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기 표현하는 데 쓰이길”

[경향신문]

경향신문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표현한 한글 글꼴 ‘길벗체’를 개발한 ‘제람’(왼쪽)과 ‘숲’이 지난 23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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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빨간색 선이 아래로 꺾이며 주황색으로 바뀐다. ‘ㄱ’이 만들어졌다. 노란 작대기(‘ㅣ’)가 옆에 붙고, 초록·파랑·보라색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ㄹ’이 그 아래를 받친다. 빨주노초파보 ‘길’이 생겼다. 그 옆을 무지개색 ‘벗’이 함께한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표현한 글꼴 ‘길벗체’로 ‘길벗’을 쓰면 펼쳐지는 광경이다.

최초의 ‘전면 색상 한글 폰트’ 길벗체가 지난 20일 출시됐다. 색은 성소수자 상징인 무지개색을 썼다. 출시 4일째인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길벗체 책임개발자 ‘숲’(31·배성우)과 ‘제람’(35·강영훈)을 만났다.

경향신문

■ 흑백논리 세상, 형형색색 무지개

“한 신문에 실린 길벗체 기사를 봤는데, 사진이 흑백이더라고요. 성소수자에 대해 ‘예/아니요’의 흑백논리를 펼치는 세상에 길벗체라는 ‘색깔 글꼴’을 내놓았다는 실감이 났죠.” 강씨의 길벗체 출시 소감이다. 현직 서체 디자이너인 배씨는 “울고 싶은 심정”이라며 “한글 폰트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지 안다. 길벗체는 그 2~3배가 들었다”고 말했다.

길벗체는 지난 1월,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을 주제로 한 전시회의 테마 서체로 처음 탄생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처음 만든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는 영문 서체 ‘길버트체’를 한글판으로 개발했다. 반응이 좋아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다. 배씨와 시각예술가 강씨, 팀원 5명이 모였다.

서체를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팀원 모두 생업이 있었다. 주말은 거의 반납했고, 평일에도 퇴근 후 3~4시간은 쏟아부었다. 상용한자 3000자의 색과 획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다행히 팀워크가 좋았다. 성소수자인 강씨와 그의 ‘앨라이’(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인 배씨는 11년지기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은 프로젝트를 함께하자는 강씨의 제안에 기꺼이 후원금 모금에 나섰다. 1500만원을 목표로 시작한 모금에 474명이 2694만원을 보탰다. 강씨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함께 만든 서체다. 새로운 방식의 연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차별 겪는 모두를 위한 응원

오랜 작업 끝에 지난 20일 길벗체가 공식 출시됐다. 호응은 뜨거웠다. 서체를 내려받을 수 있는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가 트래픽 과부하로 수차례 다운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이 이어졌다.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데 길벗체가 쓰였으면 좋겠어요”(배씨). 이들이 많은 작업 중에서도 ‘서체’를 선택한 이유다. 강씨는 “사람들이 길벗체를 한 번 더 봐주면 우리는 성소수자를 한 번 더 호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트랜스젠더와 양성애자의 상징색으로 길벗체를 2개 더 만들고 있다.

길벗체는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우울한 현실에서도 명랑한 삶을 지켜나가자는 의미다. 길벗체의 ‘색깔’이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길벗체로 우중충한 글 쓰면 진짜 안 어울려요(웃음). 밝은 글을 쓸 수밖에 없죠. 이 예쁜 서체로 담으면 좋을 이야기들이, 더 확대됐으면 좋겠습니다.” 강씨가 웃으며 말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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