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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유레카] 꼼수 ‘드라이브스루’의 개천절 능멸 / 안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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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개천절은 애초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경축일이었다. 1909년 대종교를 연 나철 선생은 그해 음력 10월3일부터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거행했다. 이날은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이다. 개천절은 그 뒤 임시정부에 의해 국경일로 지정됐고, 광복 뒤에는 정식 국경일이 됐다.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양력 10월3일로 바뀌었다.

개천절은 3·1절, 광복절과 함께 3대 국경일이지만, 신도 수 4천명이 채 되지 않는 오늘날 대종교의 위상은 남루하다. 대종교의 ‘종’(倧)이 ‘신인’(神人·신이자 사람), 즉 단군을 뜻한다는 사실은커녕, 대종교가 어린이들도 다 아는 단군을 모시는 종교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은 듯하다. 대종교의 교세가 이토록 쇠한 데에는 외부요인이 결정적이었다.

대종교와 항일운동은 매우 깊숙이 닿아 있다. 나철 선생 자신이 대단한 항일지사였다. 선생은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하자 네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궁성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고, 을사5적 처단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군관학교를 세워 수많은 항일투사를 길러냈다.

별처럼 빛나는 항일 독립운동가 상당수는 대종교 교도였다. 3·1독립선언은 물론 2·8독립선언보다도 앞선 무오독립선언(1918년 음력 11월)의 발표 장소는 만주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였고, 선언서를 기초한 조소앙 선생과 거기에 이름을 올린 39명의 인사 대다수가 대종교 교도였다. 1919년 상하이(상해) 임시정부 발족 당시 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이끈 이들, 한글운동을 이끈 이들의 상당수도…. 별처럼 많아서 한분 한분 꼽을 수가 없다.

대종교 교도 수는 30만명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나철 선생을 비롯해 10만여명이 일제에 의해 순교당했다. 그렇게 뿌리가 잘려나갔다. 그나마 해방 뒤 초대 내각에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등 대종교 교도 여럿이 포진했으나, 친일세력이 다시 득세하면서 급속히 쇠하고 말았다. 오늘날, 친일세력에 깊이 뿌리박은 극우세력은 치기 어린 ‘드라이브스루’로 마침내 개천절마저 능멸하려 들고 있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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