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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우리 세대 전반부는 운명적인 현대사 드라마의 연속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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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미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정식 명예교수

한겨레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이정식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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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이 너무 길어지니까요. 어디에 또 쓰게 되면 쓸 거리를 남겨놓아야 하잖아요.”

올해 만 89살인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이정식 자서전-만주 벌판의 소년 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는 저자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1919~2011)와 공저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1974년에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 상을 받는 시점에서 끝난다. 이 교수 생애의 전반부만 보여준 이 책에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투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생생히 담겼다.

미 필라델피아 근교 자택에서 아내와 사는 이 교수를 지난 22일(현지 시각) 오전 전화로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의 순간을 묻자 그는 “1948년에 가족과 함께 중국에서 압록강을 넘었을 때”라고 했다. “당시는 북한이 중국 쪽 국경을 막고 있었어요. 고깃배를 타고 북한 땅을 밟은 우리 가족을 따발총을 멘 소련의 한 소년 군인이 받아 주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에겐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도강에 실패했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는 아마 중국 조선족이 되었을지 모르겠다면서 말을 이었다. “내 인생은 여러 면에서 정치적 영향을 받았어요. 젊은 시절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예측은 불가능해요. 소설에서나 가능하죠. 그게 우리 세대의 운명이었죠. 그런 드라마가 없었어요. 젊었을 때 드라마가 계속 있었죠. 모두 나에겐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사건들이었죠.”

일본 군부가 만주를 침략한 1931년 평남 개천군 북면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불과 세 살 때 ‘만주 유랑’에 나서 중일전쟁의 최전선이었던 한커우에서 초등 3학년까지 다녔다.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온 1941년에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1년 뒤 부모는 중학 입시를 앞둔 장남 정식을 여동생 집에 맡기고 다시 만주로 떠났다. 하지만 그는 평양2중 입시에 실패해 1944년에 홀로 가족이 새로 정착한 만주 랴오양을 향했다. 1945년 봄 랴오양공업학교에 들어간 그는 그해 여름 일본이 물러난 뒤 랴오양에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 내전을 목격한다. 처음엔 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이 들어왔으나 공산당의 도시 전술 포기로 랴오양은 국민당 차지가 됐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 치하에서 조선의용군 10여 명이 트럭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달고 조선말로 군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썼다.

한겨레

이정식 교수의 자서전 표지.


1946년 3월 조선인 피난민 구제에 헌신하던 부친이 실종되면서 15살 정식은 졸지에 ‘만주의 소년 가장’이 됐다. 그는 무면허 의사 밑에서 조수를 하거나 면화 공장 노동으로 모친과 세 동생을 부양하며 부친을 기다렸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8년에 압록강을 건넜다. 다시 돌아온 평양에서는 고모 쌀가게를 도우며 가족을 부양했단다. 이 시절 항일운동가로 이름 높던 무정 장군의 한옥을 찾아 쌀 한 가마를 배달했던 기억도 있다.

한국전쟁 때는 간발의 차로 미군 폭격을 피해 목숨을 건졌단다. ‘인민군 징병을 피해 숨어있던 평양 집이 폭격을 맞는 순간 재빠르게 툇마루 밑으로 숨었어요. 나와 보니 마루만 빼곤 집의 벽과 문이 다 날아갔더군요.’ 그는 평양에 들어와 민가 수색을 하던 국군 병사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야릇하고 답답했던” 기억도 털어놓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한 뒤에는 월남해 국민방위군 사관학교를 거쳐 중공군 포로 심문 통역관으로 일했다. ‘당시 중공군 심문 담당 미군들이 대부분 일본인 2세였어요. 중공군 포로는 다 양쯔강 이북 출신으로 표준어 북방 말을 하는데 중국인 2세 미군은 거의 100% 광둥 말만 해 서로 소통이 안 됐어요.’ 중국인이 경영하는 면화 공장에서 실전 중국말을 읽힌 데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운 그가 통역관으로 채용된 이유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3년 만에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마쳤고 1957년에는 우연히 할리우드 영화 <타임 리밋>(1957, 칼 몰든 감독)에 인민군 병사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석사를 마칠 때까지도 생존이 유일한 목표였던 그를 학문의 세계로 이끈 이는 스승 스칼라피노 교수였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 있던 스승이 중국어와 일본어 실력을 보고 나를 연구조교로 채용했죠. 훌륭한 선생님(스칼라피노 교수)이 저를 학문으로 이끌었죠.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존이 중요했어요. 한국 역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그는 자서전에 스승이 보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초고 두 장을 12살 연하 제자인 자신이 퇴짜 놓았다는 일화도 밝혔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어판도 나온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100년에 가까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전체를 일관된 흐름으로 아우른 저작으로, 국내에서는 북한의 실체를 바로 알기 위한 필독서로 꼽혀왔다.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었지만 스승은 저를 전혀 책망하지 않았어요. 스승의 글을 비판하는 습관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칼라피노 교수 댁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시작됐어요. 일본의 노동운동 등에 관해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여기서 동료 학생인 찰머스 존슨(1931~2010)은 스승에게 ‘이 대목은 당신이 새벽에 졸면서 쓴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쓰며 스승과 어떤 대목에서 견해차를 보였냐고 하자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스승과 충돌하고 그런 것은 없었다”고 답했다.

올 89살…43살때까지 담은 ‘자서전’ 내

‘만주 소년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

중국서 부친 실종·한국전쟁 구사일생

“1948년 압록강 건너올 때 가장 기억”


‘중공군 포로’ 통역관 거쳐 미국 유학

“스승 스칼라피노 만나 학문의 길로”


그가 스승과 공저한 영문 논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기원’을 두편으로 나눠 발표한 해가 1960년과 1961년이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나 공산주의 운동을 학문적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위험한 시절이었다. 더구나 그는 시베리아에서 시작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이 항일 독립운동의 일부였다는 관점을 보였고, 북한 최고 지도자가 항일무장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는다고 기술했다. ‘논문이 한국에서 나왔을 때 경찰이 저와 동명이인인 동국대 교수를 찾아갔다고 해요. 내가 그때 사찰계에 잡혀 들어갔다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기억 때문일까. 그는 한국 문화가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역사에서 주자학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주자학의 이론과 태도가 상당히 교조적이죠. 무엇을 보든, 눈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서양이나 다른 나라의 글을 보면 ‘이게 꼭 맞다’는 것보다 ‘이럴 수도 있다’는 태도가 숨어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옳다’와 ‘옳지 않다’가 상당히 중요해요. 다른 나라 문화를 보면 회의심을 가지고 의문도 제기합니다. 우리 역사와 문화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말 한 번 잘못하면 골로 갑니다. 학문 논쟁이 아니라 당파 싸움이 돼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됩니다. 어떤 이론이 새로 나와 기존 이론을 비판하면 이단이라고 공격받아요. 상당히 극렬하게요. 우리는 논쟁이 생명을 건 논쟁이 됩니다. 내가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고 한 것도 당시엔 큰일이었어요. 나는 외국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데 국내는 그런 여유가 없었죠. 한국 학자들은 (학문적 논쟁을) 자기가 속한 그룹의 문제로 받아들여요. 주변의 자기 동료, 선후배들을 의식해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가 해방 정국 지도자 중 여운형에게 특히 인간적 호감을 느끼는 것도 이런 인식의 반영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승만과 박헌영은 교조적이지만 여운형은 트인 사람이었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교수는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 운동을 이끈 몽양과 우사 김규식 선생의 평전을 쓰기도 했다. “몽양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죠. 그분의 활동 분야가 넓기도 했고 인간적으로 존경을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이 기대하게 하는 그런 성격이었죠.”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몽양이 꿈꾼 좌우합작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분들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넓었을까 생각할 때 (좌우합작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공산과 반공 진영이 합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든 일입니다.”

젊은 시절 그가 숱한 ‘드라마’ 속 인물이 된 것은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라는 조국의 처지 탓이 클 것이다. 한반도의 미래에 관해 묻자 노학자는 “낙관한다”고 답했다. “국제정치라는 게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게 많잖아요. 그래서 능력 있는 지도자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을 보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국제정치 무대에서 노력하는 것 같아요. 격랑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데서 그 자부심이 온 것 같아요. 지금은 비교적 상당히 강한 나라가 됐잖아요. 한국이 지나온 환경을 보면 지금처럼 발전한 게 놀랄만한 일이죠. 앞으로도 잘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내가 좀 낙관적인 사람이기도 해요.”

근황을 묻자 그는 “나는 건강이 괜찮은 편입니다. 곧 ‘노인 홈’으로 이사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또 다른 저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내가 늘 품고 있는 질문이 있어요. 뭐냐면 6·25 때 미군 개입으로 김일성이 아주 난처하게 됐잖아요.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한 스탈린도 상당히 당황했을 겁니다. 그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애걸해요. 소련군이 빨리 들어와 미제를 물리쳐 달라고요. 스탈린 처지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미군이 개입해 곤경에 빠지게 됐죠. 그런데 김일성의 지원 요청에 스탈린이 대답을 안 해요. 4~5일 연락이 끊어져요. 그러니 김일성이 아주 애간장이 탔어요. 그때 스탈린 상황이 어땠는지, 건강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건강 문제라면 의료진 보고가 있을 텐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요. 역사에는 중요하면서 재미난 질문이 많이 남아 있어요.” ‘스탈린의 4~5일’은 왜 중요할까? “스탈린 행동의 근본조건에 대한 답을 찾는 열쇠일 수 있어요.”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찬사도 많이 받았지만 다소 반공적이다, 파벌 다툼을 강조

했다는 등의 비판도 받았다. 다시 쓴다면 어떤 부분을 개작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우리는 초보로 그려내는 단계였어요. 황무지에서 개척했죠. 지금에 와서 다른 분 서술을 보고 나도 그렇게 써야 했다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우리는 자료를 본 대로 썼고 자료에 나타난 것을 해석했어요. 같은 자료라도 여러 각도로 해석할 수 있죠. 해석은 자료가 풍부해야 여러 가지 이론을 가지고 쓸 수 있어요. 당시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어요. 시간적 여유도 없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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