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학이 흐르는 미술관’ 비대면 낭독 콘서트
배우 윤석화가 노래하기 시작하자, 박정자가 슬쩍 다가가 옆에 앉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에….” 정동환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 바람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7일 오전 서울 관악구 관악산 끝자락 작은 절 길상사. 나무 데크로 된 앞마당을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가득 채웠다. 절 뒤편 산속에서 계절을 잊은 매미 소리, 찌르륵찌르륵 새소리가 반주처럼 들려왔다. 세 배우는 이날 ‘예술과 문학이 흐르는 미술관’ 낭독 콘서트에 함께 참여했다. 지역문화진흥원과 관악문화재단 지원으로 ‘남현동 예술인 마을 관광사업 추진단’(대표 김주혁)이 마련해 관객 없이 영상 녹화만 진행한 비대면 낭독회. 대극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카리스마의 배우 정동환과 윤석화를 한자리에 부른 이는 배우 박정자다.
지난 3월 관악문화재단 이사장이 된 그는 제일 먼저 남서울시립미술관, 미당 서정주의 집, 낙성대 길상사 같은 관악구 명소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학 낭독회를 기획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계속 미뤄졌고, 결국 이날 비대면 영상 녹화로 대신해야 했다. “숨 쉬기도 위태로운 시대잖아요. 모두의 입을 가린 마스크 안에 못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요. 이렇게라도 문학으로 문화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녹화 영상은 관악구 초등학생 온라인 사생대회의 주제 영상으로 활용된다. 아이들은 온라인으로 낭독회를 감상하고, 여기서 받은 영감을 그림으로 그리게 된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황순원(1915~2000)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읽을 때도 배우 박정자의 목소리엔 특유의 힘이 넘친다. 이날 세 배우는 ‘소나기’ 일부를 나눠 낭독했고, 아동문학가 이원수(1912~1981)의 동시에 곡을 붙인 ‘겨울나무’와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다.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도 한 편씩 낭독했다. 박정자는 ‘첫사랑의 시’, 윤석화는 ‘국화 옆에서’, 정동환은 ‘광화문’이었다. “고개 숙여 성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낯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정동환의 목소리는 명품 실크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감촉이다.
이날 낭독된 이원수·황순원·서정주의 공통점은 모두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에 살았다는 것. 1969년 서울시가 예술인아파트를 지으며 조성된 예술인 마을에는 영화배우 최은희·황정순, 희극배우 이기동·양훈 등 예술가와 연예인 100여 명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았다. 박정자는 “당시 한국예총 회장이던 이해랑 선생이 주창하셔서 만들어진 게 예술인 마을”이라고 하자 정동환은 “명절이면 예술인 마을에 세배하러 오는 후학들과 예술인들이 길게 줄을 섰다. 장관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예술가가 없는 거야, 예술 행정이 없는 거야?”(박정자) “둘 다 있긴 한데, 생각이 없는 거죠.”(정동환)
관악문화재단 양지원 기획조정팀장은 “관악구는 20~30대 청년 인구 비율이 42%로 전국 1위이고, 예술인복지재단 활동 증명된 예술가 2254명이 살며, 그중 85%인 1916명이 청년”이라고 했다. 청년 인구 비율이 높고 예술가 숫자도 많은 지역 특성과 예술인마을의 역사를 배경으로, 주민들은 ‘남현동 예술인 마을 관광사업 추진단’을 만들어 관악문화재단과 함께 예술인 마을에 남은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해왔다. 이날 낭독회도 추진단의 ‘예술인 마을 속 예술인’ 프로젝트 중 하나. 김주혁 대표는 “가을 소풍 같았던 예전의 사생대회는 아니지만, 온라인으로 남현동 문인들의 작품 낭독을 듣고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코로나 시대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배우 박정자는 “내가 요즘 계획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유튜브를 하려고. 내년이면 내 나이 80인데, 연극배우만이 할 수 있고, 내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애길 하고 싶어요. 난 ‘컴맹’이라 이메일도 없지만, ‘나 살아있어’ ‘나 연극배우야’ ‘잘 견디고 있어’ 얘기하려고. 새로운 생각을 해내고 일을 기획할 때가 제일 살아있는 것 같아요. 재미있어.” 무대에 선 박정자가 늘 그리운 관객들은 이제 곧 유튜브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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