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최민화 개인전 '원스 어폰 어 타임'
장례식 걸개그림 그렸던 민중 미술가…주몽 등 르네상스식 화법으로 재구성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화면 중앙에 큰 알을 깨고 나오는 사내 아이가 그려져 있다. 사내 아이의 모습으로부터 그리스ㆍ로마 신화를 다룬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에로스(큐피드)가 연상된다. 그림 제목은 최민화 화백(66)의 '알영-혁거세'. 알을 깨고 나오는 사내 아이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
최 화백은 1990년대 말부터 삼국유사 속의 우리 고대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20여년간 최 화백이 그린 고대사 작품 약 400점 가운데 엄선된 60여 점의 회화와 40여 점의 드로잉 및 에스키스(esquisse·초벌그림)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 건물에서 전시 중이다. 전시 제목은 '원스 어폰 어 타임(Once Upon a Time)'.
어디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느낌의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 화백은 삼국유사 속 인물을 그렸다. 그러나 표현 기법은 그리스ㆍ로마 신화 속 인물들을 그린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것이다.
최 화백은 1980년대에 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면서 전통이 현대의 일상 속에서 활용되는 여러 모습을 목격했다. 자신도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를 화폭에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사의 인물들을 표현할 적합한 도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연구하던 중 신화 속 신들을 인간처럼 표현한 르네상스 미술에서 해법을 찾았다.
최 화백은 "르네상스 미술의 재발견"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풍속화, 도속화·탱화 같은 한국 미술,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르네상스 회화, 힌두 및 무슬림의 종교 미술을 아우른다.
최민화 '알영 ? 혁거세', 2018, 캔버스에 유채,_130.3x97㎝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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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화백의 본명은 최철환이다. 1982년부터 '민중은 꽃이다'라는 뜻의 최민화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그는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이한열 장례식 추모 행렬에 쓰인 '그대 뜬 눈으로'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늘 그림에 현실의 고민을 담아냈다.
그랬던 그가 고대 이야기를 화폭에 담게 된 것은 전통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전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어느 나라나 근대화ㆍ서구화 과정에서 개발이나 경제성장을 위해 정책상 전통을 통제하는 일은 다 있었다. 유독 한국에서는 전통이 현재 활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이하고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을 현대에서도 향유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고대를 다루는 것도 전통에 대한 관심과 연관이 있다."
작품은 갤러리현대 신관 지하·1·2층 공간에 전시된다. 1층에는 고대사의 주인공들이 인물화 형식으로 표현돼 있다. 환웅과 웅녀, 호녀, 주몽 같은 낯익은 인물들이 눈에 띈다. 웅녀와 호녀를 함께 등장시킨 그림에서는 호녀가 주인공이다. 웅녀는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 제목도 '호녀'다. 최 화백은 "마늘과 쑥만 먹는 것을 견디지 못한 호녀가 더 친근한 느낌을 준다"고 자평했다.
최민화 '천제환웅 ? 신시에 오다', 2018, 캔버스에 유채,_97x130.3㎝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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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 '신시(神市)', 2020, 캔버스에 유채, 각 97x130.3㎝(diptych)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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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는 1층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가 표현된 그림들이 전시된다. '천제환웅-신시(神市)에 오다'에서는 왼편에 환웅, 오른쪽에 웅녀와 호녀가 그려져 있다. 환웅의 모습으로부터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타나 예배당에 그린 벽화 '아담의 창조' 중 아담의 모습이 떠오른다.
웅녀와 호녀 옆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웅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때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탔다. 최 화백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가 얼마나 거대할지 내 상상력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수레 없이 용만 그렸다.
그 옆의 그림 '신시'에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해 있다. 여러 인물과 함께 농경민족을 상징하는 소, 유목민족을 나타내는 말, 아랍 상인들의 낙타도 등장한다. 먼 배경에 유불선의 인물들이 한 정자 안에서 어울려 있다. 최 화백이 표현하고자 하는 고대는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우는 고대의 개념이 아닌 국경·인종·민족의 경계가 없는 시공간이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Once Upon a Time' 연작의 초기 작품을 통해 연작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최민화 화백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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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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